이제는 기득권층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일 루터가 필요하다

청와대, 교단총회, 대형교회, 교권주의자, 이단감별사들에게 항거할 용기있는 루터 필요

기독공보 | 입력 : 2016/12/08 [20:14] | 조회수: 592

최순실-박근혜 사태로 인해 한국사회가 폭발하고 있다. 주말마다 전국에서 약 200여 만명 이상이  촛불집회를 하고있다. 이는 촛불 집회가 아니라 촛불혁명 이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다. 좌우의 이념이 의미도 없이 모두 한데 모여서 자동적으로 국민통합이 되었다. 

 

국회는 여야가 하나되어 탄핵을 시도하고, 국민은 좌우가 하나되어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남한에 진정한 민심 촛불혁명이 발생하고 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더는 사익과 측근을 위한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저항을 하고 있다. 사회는 혁명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의 전제는 공익이다.

 

이번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기독교계도 혁명이 발생해야 한다. 교황식 교주식 목회자,  교인들의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목회자, 전체 교인들의 의도를 거부하고 돈있는 비선실세 교인을 우선시 하는 목회자에 대한 하야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혁명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교주식 리더에 의존하는 한기총이나 한교연 통합도 물건너갔고, 기득권유지의 목소리만 울려퍼지고 있다. 영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합은 정치적 몸집 부풀리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기독교계의 법체계가 형성이 되지를 않아 신앙과 믿음, 지연, 학연, 기득권으로만 법해석을 하다보니 법적으로는 사실상 무질서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교계의 법이 무질서하니 가이사법정으로 가는 예들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사의 대규모 혁명들은 법체계가 새로운 조건과 상황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경직되었을 때 나타난다. 역사적인 대폭발들은 일종의 암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열병으로 취급되는 불가항력적이었다. 역사적인 대폭발들은 과거의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였다.

 

기독교도 폭발이 일어나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교도들처럼 위로부터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1억이상의 연봉을 받는 대형교회목사들로부터의 혁명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내는 것 처럼 어려운 일이다. 특히 법의 개혁은 절실한데 모든 권위와 권력 정치가 이를 막고있다. 즉 기득권층이 달콤한 기득을 즐기기 때문에 개혁이라는 쓴 약은 삼키기를 거부하고 있다. 법체계의 개혁이 없이는 개혁이 없다. 루터는 중세의 신학과 교회법을 개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교계의 법체계가 우리시대의 새로운 조건과 상황을 해석하지 못하고 여전히 기득권싸움에 매몰되어 있다. 더 무질서해야 혁명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이 발생하려면 양심적인 지적인 리더가 있어야 한다. 루터나 칼빈, 막스는 지적인 리더였고 뮌처나 전봉준은 지적인 리더가 아니었기 때문에 혁명의 한계가 있었다.

 

개신교의 문제는 지적인 리더가 없다. 불행하게도 현재 교계의 리더는 지적인 역량과 철학이 부족한 대형교회목사들이다. 이들의 개혁의 의미는 기득권 유지이다. 그리고 지적으로 출중한 사람들은 자본이나 기득권의 시녀가 되어버렸다. 개혁을 할 이유가 없다. 연봉이 억대에 가까운 교수들이나 목사들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혁명을 기대할 수는 없다.

 

개혁세력들은 기껏해야 세습방지, 횡령방지등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 교리적인 것들만 비판하면 개혁이 된다고 외치고 있다. 개신교는 법시스템의 개혁이 없으면 개혁이 없다. 북한 역시 김일성주체사상이 조선인민주의공화국헌법에서 삭제되지 않는 이상 통일은 없듯이 말이다. 

 

조찬기도 설교시 대통령을 향해서 감히 누구하나 선지자처럼 예언하는 목사하나 없었다. 그러나 군소교단을 향해서는 예수믿는 사람들까지 이단이라고 용기있게 매도를 해왔다.

 

기독교는 영적인 것을 토대로 한 법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법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면 기독교는 망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카톨릭이 번성하였던 것은 오랜동안 역사를 타고 내려온 교회법체계 때문이었다.

 

튼튼한 교회법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세상법정에 나갈 일도 없었고, 자체적으로 교회문제를 해결하였고, 그 교회법적인 권위를 갖고서 거대한 교파를 이끌고 갔던 것이다. 지금도 천주교도들은 사회법정에 가지를 않는다. 청교도 역시 의회가 중심이 되어 웨스트민스터신경이라는 개신교 교리와 신학 법체계를 만들어 냈다. 법적인 혁명이었다. 결국 지성인들이 혁명에 앞장서야 한다.

 

카톨릭에서 교황은 일종의 대법원장 역할을 할 정도로 교회법의 권위는 대단했다. 개신교의 문제는 허술한 법체계로서 현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해석도 못한다.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교단재판국의 권위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지연, 학연, 파워에 따라서 승패가 갈리었다. 그러다 보면 힘없는 약자들만 희생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중세카톨릭은 세속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현재 개신교는 세속법으로의 구속을

 

현재 개신교의 법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교회법학이 발전하지 못하면 개신교의 미래는 또 다른 혁명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법의 변혁은 그 시대의 매우 심오하며 매우 광범위한 변화의 전분야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중세는 그마나 세속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하였지만 현재의 개신교는 세속법의 구속을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교황에 의한 새로운 국가의 개념은 국가의 개념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황의 우위를 선포하고 세속권력으로부터의 교회권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것이 교황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혁명은 교황권력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이었다. 세속정부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세속정부를 통하여 역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의 개신교는 세속정부의 하녀가 되었고, 세속권력에 구속되었다. 중세의 카톨릭보다 못한 교파가 되었다.

 

청와대 출입 목사들은 나단선지자처럼 예언하지 하지 못하고 세속권력의 상징인 대통령에 대해 아부경쟁을 하기도 하였다.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참석하고 설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교회신도들이나 목회자들은 교단법정을 따르지 않고 세속법정의 시녀가 되었던 것이다. 이단감별사들은 승소하면 감사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그들은 철두철미 세속법정의 노예신분으로 전락한 것도 알지 못했다. 이는 가방끈이 없거나 짧았기 때문이다. 언론사들은 종교개혁을 500주년을 맞이하여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 언론의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언론사들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에 대해서는 부패와 타락의 기념만 남았던 것이다. 학자들은 루터와 칼빈을 들먹였지만 사회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루터와 칼빈을 목적보다 학문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언론은 장사를 하고, 신학교 교수들은 현실성 없는 세미나를 하고, 교회는 기념예배를 드리지만 사회와 교계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전혀 없었다. 언론은 윤리성 지적과 장사가 개혁이었고, 대형교회는 기득권의 유지가 개혁이었고, 소형교회는 기득권자에 대한 항거가 개혁이었고, 재판국은 지연, 학연을 위주로 판단하는 것이 개혁이었다. 개신교의 현상태는 대통령에게는 아부, 법원에게는 시녀, 교단에게는 지연, 학연위주적 인맥, 연합체에게는 기득권유지가 개혁이었다.

 

그야말로 루터나 칼빈식의 개혁이 아니라 한국식의 형식상, 명분상, 권위상, 기념상의 개혁이었다.  따라서 개신교는 정신과 이를 실현하는 법제도가 개혁되지 않고 탄탄하지 못하면 망하게 되어있다. 지연, 학연에 따른 판결, 교권유지를 위한 이단판정, 학위를 위한 공부, 교수직 유지를 위한 논문발표, 신앙없는 에큐메니칼 운동, 종교개혁자들의 일사각오 정신 없는 개혁, 기념운동 등이 오늘날 국가의 위기에 어떤 것도 공헌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의 부패와 타락이 오늘날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방치한 것이다. 이제 종교개혁의 기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잘못된 교권과 국가의 권력에 항거하는 플로레타리아 혁명 이상의 영적 각성을 중시하는 종교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95개조 법적인 조항의 반박문을 청와대, 총회, 대형교회 문앞에 붙일 용기있는 루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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