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1(호남편)

편집인 | 입력 : 2019/12/27 [23:48] | 조회수: 102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즐겨읽은 책으로서 문화체육부장관을 지낸 류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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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한국문화유산의 위대성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교회가 어떤 자세를 취하였는지, 신앙인들은 어떤 유산을 갖고 행동하였는지를 한반도에서 역사한 예수의 행적을 추적하고자 선교사들과 선조들의 신앙의 유산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제목도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로 했다. 예수의 정신이 서려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예수의 흔적을 추적하여 선조들의 신앙의 유산을 추적하여 한반도의 예수의 행전을 써내려 가는 것이다. 신안에 가면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적인 삶이 있고, 여수에 가면 손양원목사의 삶이있다.  총회장을 지낸 채영남총회장의 어머니는 문준경전도사의 신도였다. 김준곤목사도 문준경전도사가 목회하던 교회의 신도였다. 문전도사의 신앙유산이 있기에 오늘도 이 신앙유산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예수의 행전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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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선교사들과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한반도에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 한반도 도처에 예수의 흔적이 있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를 하고 있다. 예수의 씨앗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뿌려지지 않았더라면 근대화는 생각보다 지체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선교사들과 믿음의 선조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예수의 행전을 찾아내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일 것이다.

 

먼저 필자는 나의 신앙유산 답사지로서 호남을 꼽았다.

 

호남 지방은 삼국시대이전에는 마한에 속한 지역이고, 삼국시대는 백제에 속했고, 현재의 전북지방에 해당하는 김제 벽골제와 금강 하류의 남쪽에 위치한 전남지방을 말한다. 동쪽으로 소백산맥을 두고 영남 지방과는 지리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리산의 남동부에는 섬진강이 흐르며, 영남 지방과 경계를 이룬다. 북서쪽으로는 금강이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북동쪽으로 대둔산(878m)과 민주지산(1242m)의 산맥을 기준으로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호남 지방을 평야로 만든 대표적인 강은 영산강과 섬진강, 만경강, 동진강, 탐진강, 금강이 있다. 이러한 강은 호남땅을 비옥한 평야로 만들어 일제시대는 수탈의 본거지가 되게하기도 했다. 영산강은 전라남도 담양에서 발원하여 광주와 나주를 거쳐서 서해바다로 흘러가고, 충청도를 구분짓는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발원하여 충청도로 흘러 가고, 만경강은 완주군에서 발원하여 전주시, 익산시를 거쳐 김제평야를 적시면서 서해바다로 가고, 동진강은 정읍시에서 발원하여 김제시를 거쳐 부안군을 거쳐서 서해바다로 간다.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에서 발원하여 임실군을 지나 전라남도 곡성군과 광양시로 흐르고, 전라남도 남부를 흐르는 큰 지류 보성강이 있다. 영산강은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발원하여 광주광역시, 나주시를 거쳐 영암군에서 황해로 흘러든다. 호남은 가는 곳마다 물길이 평야를 적셔서 넓은 곡창지대를 가능케 했다.


호남사람들은 곡창지대에 평화롭고 부유하게 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지리적 조건이 오히려 부족간, 외세간의 수탈과 약탈의 대상이 되어와 한 시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호남 땅은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전쟁과 항쟁, 피의 역사였다. 이는 천부적인 곡창지대 때문이었다. 삼국시대이후 부족간 서로 땅따먹기를 하느라 전쟁에 패배하면 자연적으로 식민지가 되어 민중들은 항시 피폐한 삶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천혜적인 자연조건이 오히려 호남을 주변지역으로 만들었다. 

 

삼국시대에 전쟁에 패배하면서 호남은 차별지역으로 전락하게 된다. 고려시대는 단지 후백제라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차별을 당하고 조선왕조시대는 사림파와 정여립의 난 때문에 차별을 당하고, 근대까지 와서 경상도 독재자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한번 지역적으로 차별을 당하였다. 그러한 연고로 호남지방에 가면 광양이나 여천이외에 거대한 공장이나 회사하나 없고, 산업도시로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살기어려운 호남인들은 부천이나 인천, 안산, 영등포 같은 서울의 외곽도시에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꾸려나갔다. 호남은 주변지역으로 전락하였지만 항시 정신은 한반도의 중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 임진란 때에는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도 없었고, 현대에 들어서 호남이 없었다면 민주화도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과 광주사태는 이 나라를 민주화로 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호남에 대한 교회사적 연구와 선교사적 연구가 있어왔지만 호남의 선조들의 신앙유산답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호남은 다른 지역과 달리 혁명의 한, 전쟁의 한, 유배자들의 한, 차별의 한이 서려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호남인들은 이러한 한을 잘 극복해서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호남지역의 신앙유산을 답사하는 것은 결국 예수의 행전을 거슬러 찾아가는 것이다. 예수가 걸어간 길을 추적해 내는 것이다. 예수는 호남에 병원, 학교, 교회, 선교사, 목회자들, 신앙인들을 통하여 호남에서 행전을 하셨다.

 

 기독교 전래 이전의 호남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 호남의 사상과 의식을 형성한 요인들로는 자연환경, 미륵신앙, 선종, 의리와 실천을 위주로 한 성리학을 들 수 있다. 넓은 평야와 수로의 이용이 용이한 호남의 지형이 일찍부터 중국, 일본과의 교류를 촉진하면서 개방성과 진취적인 성향을 형성하였고, 삼국시대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사상이었던 미륵신앙으로부터 이상과 개혁을 추구하는 호남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전북 김제 금산사에 가면 미륵성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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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지역이 백제에 복속되기 전 마한의 최고의 문화수준을 유지하였던 영암에 거주하였던 왕인박사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고 그들을 교화시켜 큰 공을 세웠다호남지역은 이미 백제시대부터 바다를 통하여 불교를 받아들였고 일본으로 전파시킨 매개자이기도 하다. 전라도의 법성포라는 지명은 불교의 전래에서 유래되었다. 호남은 선종중심의 불교가 융성하였다. 이론보다는 실천중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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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오늘날 호남인들이 민주화를 실천하는 마음을 불어넣기도 하였다. 그래서 호남에는 불교의 문화가 상당히 발전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승단을 대표하는 거승들이 상당수 호남 출신이었고 전국 유명승려들의 44%에 이른다.

 

호남불교의 특징은 선종 중심의 불교이기 때문에 실천수행적 자세로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국란을 당했을 때 이곳의 승군들의 활약상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근대에 들어서 경허스님, 만공스님은 근세불교의 중흥을 일으켰고 일제 강점기에 박한영은 한용운과 함께 불교유신운동을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 불교의 주체성을 확립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서자 불교는 억제되고 유학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호남유학은 고려시대에 자리잡은 선종의 실천수행적 의식과 조선조 유학이었던 성리학이 접목되어 의리와 실천을 위주로 한 실천 유학의 모습을 갖추게되었다.

 

의리와 실천적인 호남정신의 확립은 조선조의 호남 유학자들에게 발원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 유교시대에는 호남을 중심으로 사림파가 형성되어 유학의 많은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정치적으로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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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미국선교사가 한국에 당도하였을 때는 동학이 발생하였을 때이다. 동학은 1884년 발생하였고, 미국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한국에 당도한 것이 1885년이다. 외국 선교사들은 동학혁명이 발생하였을 때,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왔기 때문에 동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입장을 가졌다. 동학은 서학의 영향을 받아 최제우가 만든 종교이고, 천주교와는 반대 입장에 섰지만 유일신과 같은 개념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학과 동학은 차이점도 있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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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에 유불선이 결합되었다. 동학은 일부 선교사들의 헌신과 도움으로 개신교와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선교사들은 다친 동학도를 치료도 해주고 먹을 것을 주기도 하였다. 훗날 동학이 패배한 뒤 일부 동학교도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가는 배를 타기도 하였다. 구한말 동학이 새로운 종교로 포교활동을 벌이기 이전에는 불교와 유교가 백성들의 정신을 장악하고 있었다.

 

불교와 유교의 나라

 

삼국시대 4세기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 918년부터 1392년까지 국교로서 존재하여 국민들의 정신을 장악하였지만 불교의 부패로 인해 국가의 쇠망을 가져왔고 급기야 새로운 왕조를 열게된 이씨조선이 억불숭유정책에 편승하여 유학이 조선인들의 삶을 지배하며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와 유교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국가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지 못하였다. 불교는 산속으로 들어갔고 유교는 허례허식에 빠지고 양반과 상민을 이분적으로 구별하여 신분차별을 하였다. 유학은 부국강병이나 실사구시로 가지도 못하고 형이상학적인 당파논쟁에만 머무르고 척사양이만 외쳐 부강한 국가양성에는 실패했다.

 

특히 조선조말 유학은 부질없는 논쟁과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당파를 양산하고, 국익에 실제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였다. 특히 외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조선조말기에 일부 유학자들이 실학에 심취하여 실학을 통하여 국가의 미래를 꿈꾸었으나 민중들의 정신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대안제시이외에 실천으로 가기까지는 요원했다.

 

이처럼 한반도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 조선시대는 유교라는 두 종교가 국교였지만 결국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1910년 한일합방을 맞이하면서 두 종교는 백성들로부터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러나 1000동안 불교와 유교가 국교가 되어 한민족의 정신세계 이면을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불교와 유교가 정신세계를 받치고 있는 한반도에 서구의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한반도에 들어와 한반도는 새로운 외래 종교를 수용하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한국인들은 종교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바로 수용하는 종교적 자세가 열려있었다.

 

기독교의 전래

 

기독교가 들어온 지 약 130년이 되는데 한반도는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야 할 정도로 기독교는 항일운동에 앞장서고, 나아가 6.25이후 국가를 건립하는데 정신적 토대가 되고, 독재정부와 싸우기도 하지만 영락교회를 위시한 서북청년들은 독재정부와 연합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앞장 서기도하고, 빈곤을 퇴치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영락교회를 비롯, 많은 한국의 교회들이 복지사업에 뛰어들어 사회의 약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주고 변질되기 이전의 조찬기도회를 통하여 국가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반공정신으로 무장하여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데 앞장서고 사회윤리를 위하여 동성애를 적극 반대하기도 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장로교의 복음주의적인 영향에 따라 중도보수의 입장을 띠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국가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는데는 앞장섰다.

 

이처럼 한국의 기독교는 고작 13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선교사들이 예수의 씨앗을 갖고 와서 이 땅에 뿌림으로 인해 그 열매는 항일투쟁에서 조국근대화까지 말할 수 없이 컸다. 병원을 설립하여 국민들의 건강을 보전하고, 학교를 통하여 근대민주발전의식을 함양하고, 교회를 통하여 윤리의식이 투철해져 검약과 절약, 건강한 가족질서와 사회의식, 자본주의, 등을 확립하게 되었다. 3.1운동의 이면에도 기독교인들이 70% 이상 차지했고, 33인중에도 50%이상 기독교인들이었고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의 지도자들인 이승만, 안창호, 백범 김구, 이상설, 조만식, 유관순, 안중근 등도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기독교의 신앙을 통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승만도 기독교인이고, 심지어 박정희정부까지 기독교와 연합하여 한국 경제를 일으키는데 노력을 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경직목사가 세운 영락교회의 서북청년단은 박정희 정부에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심지어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도 기독교세력을 활용하여 국가통합에 앞장섰다. 서북청년단이 많은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는 전두환의 조찬기도회에 참여하여 국가를 위해 기도를 하기도 했을 정도로 독재정권의 수장들도 기독교의 세력을 국가건립에 최대한 활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김대중대통령도 기독교인(천주교)이었고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도였을 정도로 김대중 대통령부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그 이후 김영삼, 이명박 전대통령도 개신교의 장로였다. 그만큼 기독교는 사회영향력을 가지면서 민족들의 정신을 사로잡게 되었다. 특히 호남지역에 뿌리내렸던 기독교는 호남인들이 민주화의식을 고양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호남 기독교의 시작

 

호남은 1892년에 한 선교사가 당도하여 예수의 씨앗을 뿌렸다. 호남이라는 토양에서 그 씨앗은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이 얽힌 땅에 뿌려지지 않고 옥토에 뿌려져 오늘날까지 호남은 학교, 병원, 교회를 통하여 엄청난 예수의 결실을 맺었다.

 

 

▲  전주예수병원

 

▲   기전대학교



그 씨앗은 지역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훗날 학교와 교회는 항일정신과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정신적 산파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씨앗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민족의식과 복음의식, 정의감을 고양하는데 하나씩 열매를 맺어가기 시작했다.

 

미국남장로교의 한 선교사 레이놀즈가 호남에 발을 내디딘 이후, 130여년이 되었는데 그 예수의 씨앗은 때로는 항일운동에서 열매를 맺기도 하고, 6.25 이후 반공이념을 무장하고, 경제성장을 통하여 빛을 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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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기독병원이나 전주예수병원, 전주기전대학교, 호남신학대학교, 광주 수피아 여고 등은 선교사들이 뿌린 신앙의 유산이자, 예수의 씨앗의 결실이다. 한센병자들이 많은 소록도, 여수 애향원도 모두 예수의 씨앗의 결실들 이다. 호남은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이었지만 다른 한편, 예수의 행전을 통하여 수많은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특히 호남은 수많은 희생자들을 통하여 민주주의 산파의 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는 삼별초의 한이 있었고, 조선시대는 임진란과 유배자들, 사림유학자들의 한이 있었고, 구한말에는 탐관오리들에 대한 백성들의 한이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한이 있었고, 6.25 동란시에는 영광지역 순교자들의 한이 있었고, 독재정권시대에는 민주투사들의 한이 있었다. 호남은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역사의 체취가 살아있는 곳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남도답사 일번지로 강진과 해남을 택한 이유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메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체취가 살아있으며, 이름없는 도공, 이름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전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한의 땅 호남

 

호남은 한의 땅이다. 신안의 섬들에도 신도들과 농민들의 한이 있었고, 목포에는 수탈을 당한 농민들의 한이 있었고, 영광에는 순교자들의 한이 있었고, 광주에는 민주투사들의 한이 있었다. 이러한 한의 지역에 예수는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 목회자들, 학교, 병원 등을 통하여 행전을 하면서 한을 치료하고 있었다. 수많은 신앙인들은 선조들의 신앙유산의 답사를 통하여 그들의 한을 치유하고 있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예수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필자는 한국의 문화못지 않게 130년 밖에 안되었지만 전국 8도 신앙의 유산답사를 하는 것도 의미있다고 판단하여, 호남지역부터 신앙유산답사를 하기로 했다. 신앙답사를 하는 이유는 구한말 1885년 미국의 선교사가 예수의 씨앗을 한국에 뿌리기 위해 내한하였는데 그 씨앗이 어떻게 결실하여 지금까지 성장하였는지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호남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호남은 외세와의 항쟁, 좌우 이념의 갈등, 혁명, 유배로 인한 아픔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호남에 우리 민족의 모든 한이 녹여있다.

 

전쟁의 한, 유배자의 한, 순교의 한, 이념의 한, 독재투쟁에 대한 한 등 글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가 남아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외세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지켜내고, 내부적으로는 탐관오리의 수탈과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화될 때까지 호남의 정신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하위도의 정신

 

호남사람들을 고용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장군은 호남없이 국가가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호남은 오늘의 한국사회가 있기까지 이념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준 고장이다. 하위도에 가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조그만 섬 하위도에서 민주주의 의식이 싹텄던 것이다. 하위도는 일찍부터 농민들이 땅을 찾기 위하여 일제와 투쟁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하위도에서 이 나라의 대통령과 노벨상 수상자를 잉태시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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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착취당한 섬주민들은 일찍부터 일제에 저항하는 정신을 삶으로서 터득하였다. 이처럼 섬이라도 호남은 정치성이 강한 지역이기도 하고, 외세이든 내세이든 투쟁의식이 강한 지역이다. 호남은 여성들까지도 항일정신이 투철한 고장이기도 하였다. 이는 기독교가 가져다 준 신교육 때문이었다.

 

호남의 여성들

 

호남지역 3.1운동에서 여성들은 군중동원, 태극기 제작, 격문과 선언서 인쇄 및 배포를 담당하고 시위 군중을 이끄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조직적 저항운동의 대표적인 집단이 광주 수피아여학교, 전주 기전여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들이다. 이들이 3.1운동 과정에서 조직적 주체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를 통하여 교육이념, 민족의식의 성장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 세 학교는 모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독교계 여학교이다. 선교사들은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학교를 설립했지만 근대적 공교육 시스템이 거의 없던 당시, 이들은 지역 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특히 여성들은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새로운 문물·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대 환경에 적응하려고 했다.

 

지금까지는 유교사상에 힘입어 여필종부나 남존여비사상으로 여성들은 봉건적 인습에 희생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학교의 도움으로 여성들은 여성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인권의식이 고양되었다. 유교는 남성위주적이 었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차별을 당하였다. 교회에서도 부부유별이나 남녀칠세 부동석으로 알려진 관습 때문에 남녀가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김제 금산에 지어진 형의 예배당(1908), 익산 두동교회(1923)에 세워진 형의 예배당은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기독교교육이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면서 기독교신앙에 입각한 민족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신교육이 가져온 변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여성은 남성들과 점점 평등하게 가는 교육이었다.

 

기독교 학교

 

기독교계 학교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민주주의 교육과 자유·평등사상에 의한 자주적 교육활동 등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교육의 최대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근대의 시대정신,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배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은 3.1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피아여학교에서는 열세집, 반일회, 백청단 등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는 한편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1921년 목포만세사건을 일으켰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과정에서도 수피아, 기전, 정명의 여학생들은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호남에 뿌려진 예수의 씨앗은 호남여성과 남성들의 정신과 혼을 일깨워 민족의식을 갖는데 일조했다. 기독교의 근대화교육은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데 일조를 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사태에도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가 구국의 종교로 변해가면서 항일의식, 민족의식, 여성의식을 일깨웠다. (계속)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1(호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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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2(호남편), 차별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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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3 (호남편), 조선의 개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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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4 (호남편), 기묘사화와 기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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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5(호남편), 사림과 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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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6(호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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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7(호남편), 실학과 서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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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8( 호남편), 실학과 서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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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9(호남편), 실학과 임진왜란을 통한 서학

 http://kidogkongbo.com/2052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10(호남편), 해외로 간 동학

http://kidogkongbo.com/2057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11 ( 호남편), 선교사들이 본 동학

 http://kidogkongbo.com/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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