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2(호남편), 차별의 한

마한부터 후백제까지, 차별의 역사

편집인 | 입력 : 2019/12/31 [13:40] | 조회수: 154


마한의 역사

 

호남을 알기위해서눈 먼저 마한이라는 부족국가에 대해서 알 필요성이 있다. 마한은 백제에게 일찍 멸망하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그리고 연구사에 있어서도 우리 역사의 변방에 있었다. 마한은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 분포한 삼한(三韓) 중의 하나로서 대체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小國)을 가리킨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해 보면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백제는 금산사에서 개국하여 6백여년이 지났다"고 하여 삼국시대 이전에는 청동기문명을 가졌던 마한이 현재의 호남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4세기 백제 근초고왕시대에 철기문명을 가진 백제에 점령당해서 마한은 사라지게 되었다. 마한의 부족들은 고조선때부터 유이민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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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54소국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약 10여 만 호(戶)가 된다고 한다. 각 소국에는 우두머리가 있는데, 세력의 대소에 따라 신지(臣智)·읍차(邑借)라 불렀다. 마한 소국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마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이주 정착하여 성립시켰다고 보는 삼한이동설의 입장도 있으나, 대부분은 선주(先住) 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 삼한이 대두했다고 본다.  한반도 북방 요하지역에 위치한 동이족들이 남한으로 밀려오면서 정착했다는 설도 있지만 자생적으로 한반도에서 형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 BC 1세기 이후 위씨조선계 유민과 문화가 유입되고,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부여계 유이민 집단의 정착 등으로 인해 청동기문화 단계에 지나지 않았던 마한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후부터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 지역은 한강 유역의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와 목지국(目支國) 중심의 토착세력권이 병존하는 상태였으며, 이후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가 점차 마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편제 질서를 확립해 간 것이다.

 

백제문화

 

이로써 원래 호남을 장악했던 마한의 부족들은 백제에 종속됨으로 인해 백제문화가 싹트게 된다. 영남측이 신라문화의 중심지였다면 호남은 백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영암군 내동리에는 마한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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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호남인들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고, 삼국시대에서는 백제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나주 복암리에서도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   나주복암리 백제시대 유물

 

 

호남에서 혁명, 항쟁, 전쟁이 많아서 마치 호남인들이 북한의 고구려인들처럼 호전적이고 투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고조선시대 이후로 풍요롭고 넓은 땅덩어리로 인해 유순한 부족민들이었다. 

 

▲호남 김제평야

 

알다시피 백제는 경기이남 충청도일대와 호남지역을 무대로 설립한 부족국가로서 화랑도정신을 이어받은 신라인이나 북방의 오랑캐들과 싸우는 고구려인들처럼 호전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호남인들은 외세나 반봉건투쟁, 반독재투쟁에 있어서는 어떤 지역보다 호전적이었다. 임진란때도 영남지역은 일제에 의해 뚫렸지만 호남지역은 뚫리지 않았고 진입로를 차단했다. 이순신장군이 호남없이 국가가 없다는 말을 할만도 했다. 호남인들은 최선을 다하여 국가를 지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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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서 나몽연합군에 대한 삼별초의 항쟁도 호남인들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진도에 가면 삼별초의 항쟁 유적들이 남아 있다. 진도의 삼별초정부는 불과 반년 정도의 단기간에 남해의 도서와 연안지역에서 확실한 세력을 확보했다. 삼별초는 제주도까지 3년 동안 항쟁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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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인물 견훤과 후백제

 

신라말기에 이르면서 정치사회적인 혼란이 오게되자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상주의 원종과 애노, 북원의 양길, 죽주의 기훤 등이다.  당시 신라의 현실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주의 중심에는 진골중심, 경주중심의 구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견훤과 궁예, 왕건이었다.

 

당시 호남에서는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어 독자세력을 구축한 후,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궁예 또한 비슷한 시기에 철원을 수도로 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후백제의 건국과정은 궁예의 그것보다 2-3년 앞서 이루어졌다.  견훤은 원래는 영남사람이었지만 호남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상주(尙州)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의 방수군(防戍軍)으로 파견되어 전공을 세우고 비장(裨將)이 된 바 있었다.

 

그러난 견훤은 백제인의 후예로 자처하고 892년에 무진주(광주)를 장악하고, 901년 전주로 도읍을 옮겨 후백제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견훤은 후삼국의 통일을 목표로 하였다. 즉 일통삼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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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일통삼한을 하기 위하여 경주의 신라를 침공하는 등 하여 930년이전까지는 낙동강 이동지역을 비롯해서 후삼국 중 가장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군사적으로도 왕건군과 직접 격돌하여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주변의 호족 세력들도 견훤에 투항하였다. 나아가 견훤은 의자왕의 원수를 갚는 차원에서 일통삼한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견훤은 중국의 오(吳)·월(越)과 통교를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였고 신라의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와도 여러 차례 싸웠다. 견훤은 후삼국통일과 고구려의 옛 영토 수복을 꿈꾸었다. 견훤의 후삼국통일과 고구려 영토회복에 대한 꿈은 왕건의 고구려 계승과 서경중시 등 북방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견훤은 일찍부터 당시 성행하던 선종불교와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었다. 그의 고향 상주도 선종불교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이외에도 서남해 일대는 중요한 해상통로로 중국에서 돌아오는 선승들이 대부분 이 곳을 통해 입국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은 훗날 조선시대의 선종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호남인들이 이론보다 실천에 능하게끔하는 영향을 주게된다.

 

견훤은 익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진표의 미륵신앙을 크게 강조하고 백제부흥운동까지 그 맥을 이어나갔고, 견훤은 미륵사와 함께 금산사도 매우 중시하였다. 백제 무왕이 창건했다는 미륵사와 진표의 횔동근거지였던 금산사는 모두 견훤의 백제부흥과 미륵신앙의 상징적인 사찰이다.

 

   

▲  금사사 미륵성지

 

금산사는 후백제의 견훤이 유폐되었던 절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는 백제시대에 지어지고 신라의 통일 이후 혜공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절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 불교의 주류였던 교종 계통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역할을 했는데, 법상종이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종파라 이곳 절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없는 대신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절의 중심이다.

 

▲     금산사 미륵전

 

▲    금산사

 

 

견훤은 후백제를 만들면서 백제승계의식과 미륵신앙을 통한 이상사회의 실현을 꿈꾸었다. 미륵신앙은 불교의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게 된  종말론적인 보살이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현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이념으로, 지나치게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불교가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종말론적인 신앙형태가 곧 미륵신앙이다.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라는 면에서 불교역사에서 깊은 종말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견훤은 현실의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후백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말세에 살고 있었다는 종말론적인 의식이 있었다. 금산사에 있는 미륵신앙탑은 이를 잘 반영하기도 하였다. 미륵신앙은 현실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민심을 사로잡는데 활용되었고, 당시 호남지역 주민들에게는 끌리는 이데올로기였다. 미륵신앙의 출현은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농민반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동학농민혁명도 종교의 종말론적인 요소가 있었다.  백제의 유민인 진표의 미륵신앙은 그의 활동 본거지였던 전주나, 익산, 김제 등 후삼국시기 이 일대의 주민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신앙은 동학농민들이 부적을 몸에 놓고 싸우면 총알이 뚫리지 않는다는 종교적 신념을 갖게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신라나 고려, 조선시대 말은 종교의 타락이었고, 정치의 부패였기 때문에 민중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견훤은 외교정책에도 민첩하였고 상황에 따라 명분과 실리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대외관계를 실현하기도 했다. 그러한 견훤의 한계는 자신이 경상도 출신으로 백제의 계승자이면서 삼한통합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신라 왕실에 대한 존왕의 의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신라왕족의 직계 후손에 연결시킨 것은 백제계승자임을 표방했던 정치철학과는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다.  

 

이는 견훤의 통치철학의 부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 견훤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종말론적인 미륵신앙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지방호족과 결합하는데 초기에는 어느정도 실효를 거두었지만 호족들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는 실패하였다. 초기 점령했던 광주의 호족과 나중에 수도로 정한 전주호족들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즉 전남과 전북의 호족들의 화합을 시키는데 실패한 나머지 훗날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 일대의 해상세력이 견훤에게 등을 돌린 것은 후백제 성장의 치명타가 되었다.    

 

대중국, 대일본의 외교에서는 정체성문제로 인해 한계를 드러냈다. 후백제는 장보고가 펼쳐놓은 업적으로 인해 오월과 후당과의 외교에 앞장서서 후삼국 중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일본과 중국이 견훤에 대해서 백제왕과 함께 신라서면도통이라고 하여, 신라의 후계자인 것처럼 인정했다. 즉 후백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견훤은 정체제도에 있어서도 실패하게 된다. 정치제도에 있어서도 견훤은 백제의 정치제도를 계승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의 것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그가 영남(상주)출신이었기 때문에 호남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리더십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

 

견훤이 영남사람이면서도 백제승계를 내세운 이유는 전주천도후 세력기반이 된 전주, 익산, 김제 등 전북 내륙지역은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1세기가 지날 때까지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진 백제계 인사들에 의한 반신라적인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표의 미륵신앙을 통한 백제 부흥운동이 그것이다.  그러나 920년대 후반에 오면서 정체성문제로 인해서 후백제는 기울게 된다. 그는 후백제를 건국하였으면서도 신라의 제도를 따르는 등 하여 백제문화의 독특성이 없었던 것이다. 무늬만 백제였던 것이다. 결국 고려가 신라와 동맹하여 후백제와 대결하게 되면서 기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왕건과 견훤이 고창에서 전투를 하게 된다. 처음에는 견훤군의 군세가 워낙 기세 등등하였기에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고려군은 강공훤과 홍유가 최악의 경우 고창을 사실상 포기하고 퇴각하는 것이 옳고, 이 경우 죽령은 견훤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는 샛길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고 왕건에게 진언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군의 최대의 명장인 유금필이 나서서 중국 전한(前漢)의 조착의 발언, "병기는 흉기요. 전투는 위태로운 일이니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서 승부를 결정할 수 있다" 를 인용하면서 조언을 하자, 왕건은 이를 받아들여 고창 전투의 서막인 '저수봉 전투'에서 견훤에게 대승리를 거둔다. 당시 견훤군대는 8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고려군에 잡히게 된다.  

 

후백제는 고려에 대한 적극적인 정복전쟁을 벌여 한 때는 크게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지만 후백제 왕실의 내분으로 인해 고려와의 고창전투에서 패배를 계기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930년후에는 전세가 역전이 되었고, 결국 견훤은 신검의 정변으로 폐위되고 이어 고려에 멸망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전라도뿐만아니라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왕건의 눈으로 볼 때, 후백제는 견훤으로 인해서 차별지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처럼 견훤과의 전투로 인해 고려의 태조왕건은 호남에 대해 차별정책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호남차별의 훈요팔조

 

943년 태조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박술희(朴述希)에게 자신이 조언을 한 훈요십조는 후세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이라고 한다. 「훈요십조(訓要十條)」는 고려왕실의 헌장으로 태조의 신앙·사상·정책·규범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훈요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서(信書)이며 뒷부분은 본론격인 10조의 훈요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훈요 8조 이다. 이는 당시의 견훤으로 인하여 후백제를 차별하는 조항이 나온다. 

  

훈요8조: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외(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徭役)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제8조에서 말하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외()’를 원문 그대로 인정하여 차현 이남, 공주강 밖 사람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러한 지역적 범위에 대해 후백제 전체 지역으로 보는 견해, 후백제 중심지였던 전주 권역으로 보는 견해, 후백제와는 무관한 공주·청주 일대로 한정하여 보는 견해도 있다. 왕건은 호남사람들이 다시 견훤의 후예로서 반역을 감행할 것을 예측하고 외척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혼란해 질 것을 판단하고, 호남에 대한 지역적 차별을 노골적으로 했던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

 

테조왕건의 유언인 훈요 8조가  호남을 두고두고 차별지역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말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리서인 『택리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까친다. 『택리지()』는 우리나라 실학파 학풍의 배경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지리서이며 『동국여지승람(輿)』을 대표로 하는 종전의 군현별로 쓰여진 백과사전식 지지에서 우리나라를 총체적으로 다룬 팔도총론, 도별지지, 그리고 주제별로 다룬 인문 지리적 접근을 갖춘 새로운 지리지의 효시이다.

 

그러나 이중환은 당시 호남사람들에 대해  "풍속과 음악과 여자, 그리고 사치를 숭상하고, 경박하고 교활한 사람이 많으며 학문을 중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한 사람이 경상도보다 적다"라고 하여 혹평을 하였다. 호남 사람들이 지역적 차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족국가간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마한이 백제에 복속되고, 백제는 통일신라에 점령당하고, 후백제는 고려에 정복되면서 승자들의 갑질이 호남을 차별지역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태조의 유훈에 의해 호남인이 중앙집권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조말기에 영조1년에서 고정 13년 사이에 49회의 과거시험 합격자중에서 총 2103명 중 경상도의 402명에 이하여 전라도는 216명으로 그 반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가면서 선교사들은 호남을 차별지역으로 보지 않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근대시설을 하나식 들여오면서 호남을 평등한 지역으로 판단하고, 인물들을 하나씩 길러냈다. 현대에서 유일하게 호남인들이 한국에서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민주화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또 주인이 되자는 제도이다. 호남인들은 자신들은 지역적으로 차별을 당하면서 외세와 독재정권에 차별당하지 않기 위하여 항일과 반외세, 반봉건, 민주화운동에 가장 앞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차별의 쓴 맛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계속 )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1(호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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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2(호남편), 차별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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