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6(호남편), 기독교 선교 토대를 마련한 실학

호남이 실학의 집대성 중심지

편집인 | 입력 : 2020/01/20 [05:49] | 조회수: 77

호남은 일찌감치 실학이 발전한 지역이다. 이러한 실학은 기독교의 실사구시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들어오는데 실천학문으로서 사상적 발판을 깔아두게 두었다. 특히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기독교(천주교)신자였기 때문에 서학에 대해서 수용적이었고,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형이상학에 머물렀던 성리학 대신 실학과 같은 실천 학문에 자동적으로  관심을 두게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병원과 학교세우기는 실학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이러한 실학이 호남에서 시작하고 호남에서 완결을 이루었다. 반계 유형권은 약 1만 권의 책을 읽고 전북 부안 산중턱에서 실학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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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호남, 제주도, 부산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배자들의 유배지였다. 유배지는 유배자들의 제2의 고향이 되어 유배자들의 한과 학문이 서려있는 지역이다. 유배자들은 유배지에서 지역민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학문과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배자들의 학문 활동이 지역사람들과 후학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훗날 호남인들이 일찌감치 지적인 깨달음을 갖게 하였다.

 

정약용은 경기도 양평사람이지만  정약용은 1801년(순조 1)의 천주교 박해 때 유배를 당하여 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약 500권의 실학서적을 집대성하면서 지역 사람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원래 유학은 실천적인 것을 중시하는 학문이었다. 조선을 창업하면서 정도전은 중국에서 온 주자의 성리학을 끌어들여 국가의 사상적 기저로 삼고 성리학 사상에 입각하여 국가를 세워나갔다. 성리학의 실천으로 얻은 가장 큰 공헌은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이는 유학의 위대성이 었다.

 

그야말로 성리학자들은 조선의 일등공신들이었다. 유학은 기존의 불교와 도교와는 달리 실천을 지향했다. 그래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당시 고려인들에게는 역적이었지만 부패한 고려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여전히 부패한 종교로 전락한 불교의 영향아래서 벗어나지 못하여 오늘날의 불교영향권에 있는 동남아의 국가처럼 되었을는지 모르고 한자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위하도 회군

 

위화도의 역성혁명은 새로운 한반도의 역사를 써 내려간 사건이었다. 한국은 중국의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나 한민족의 독창적인 문자를 개발하여 새로운 한반도의 문자역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오늘날은 한류의 영향으로 전세계국가에서 한국어를 배우느라고 열심이다.

 

하다못해 콩고 자유대학에서도 한글을 가르쳐 아프리카 학생들이 한국을 배우고 있다. 현재 200만명이나 되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머물면서 한글을 배우고 있다.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집현전 학자들이 유교를 실용화하여 만든 한글덕분에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혜택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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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시대초기 조선을 확립하는데 앞장섰던 성리학을 한 일등공신들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긍정하면서 세도정치를 하게 되고 정치 일선으로 가면서 장기집권을 하게 되는 훈구파로 전락하였다. 

 

오늘날 정당들도 한번 정권을 잡으면 장기집권을 하기위해 민심에 위반되는 무리수까지 두게 된다. 이승만, 박정희 등은 한국사회를 위하여 엄청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 결국 말로가 비참하게 끝나게 되었다.

 

김영삼, 김대중도 자식들이 감옥에 가기까지 했고, 전두한, 노태우는 사형수로 전락했고, 노무현은 자살로, 박근혜는 국정농단으로, 이명박은 개인비리로 감옥수가 되었다. 초심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이 바뀌면 문재인대통령도 결고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훈구학파나 사림파처럼 정치적 마약을 먹고 무리수를 두면 안되는 것이다. 정치는 순리에 따라야 한다.

 

교단의 총회장들로 마찬가지 이다. 원심과 초심을 떠나거나 순리를 떠나면 무리수를 두게되어 결국 명예가 몰락한다.  정치인이든 교계정치인이든 훈구파나 사림파처럼 세도정치에 익숙하거나 학연, 지연, 교리에 따라 사색당파를 만들면 말로가 비참해진다.

 

훈구와 사림의 말로

 

정치맛을 안 훈구파와 사림파의 말로는  비참했다. 정치의 달콤한 맛을 본 훈구파들은 성종이 들어서면서 점점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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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禍를 일으켜서 사림들을 죽이고 유배를 보내는 등 일시적으로는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훈구파들은 역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사림파도 도학정치를 한다고 벼슬도 하지 않고 정치일선에 물러나서 학문만 연마했지만 성종 때 정권과 유착하여 자체적으로 분파와 당쟁에 시달리면서 결국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맞이하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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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당파에 안주할 무렵 일본과 청나라는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이웃 조선을 집어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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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하학으로 무장한 일본과 청이 형이상학으로 무장된 조선을 치는데는 식은 죽 먹기였다. 기독교가 외부로 부터 난타를 당하는 것도 지나칠정도로 교리와 신학사상이라는 형이상학으로 무장되어있기 때문이다.

 

칼빈과 바르트, 성서학의 문서설은 형이상학들이다. 세상은 첨단 가상현실사회로 돌입하고, 신자유주의 사대가 되었는데 기독교는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교리논쟁과 교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사림파들도 중국의 성리학으로 무장하면서 理를 중시하느냐 氣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사색당파로 나뉘고  국제전에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

 

결국 형이상학에 불과한 성리학은 양란을 거치면서 무너지게 되었고 새로운 사상과 철학적 기반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교의 한계가 30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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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면서 국교로 채택되었던 유교가 조선 선조 25년(1592년)부터 31년(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친 임진왜란과 인조 14년(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발생한 병자호란에 대해서 어떤 대책도 마련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무기를 만들고 국제전을 대비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理와 氣를 해석하는데 사색 당파를 만들면서까지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결국 탁상공론을 일삼았던 사림파들이 평생 신주단지로 모셨던 성리학의 理과 氣의 해석만 갖고서는 양란을 대응할 수가 없었다.

 

현재 한국도 국론이 좌우파로 분열된 상태에서 기독교 신학의 기독론, 종말론, 성령론, 칼빈신학, 바르트신학 등이 어떤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그러다 보니 사림파의 사색당파처럼 대외적 관계는 포기하고 교단내적인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자신과 다르면 이단, 삼단, 세습 운운하면서 서로 총질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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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의 국제관계는 미국, 일본, 중국, 북한과의 관계에서 그리 녹록치 않다. 한국이 원하는대로 되는게 없다. 내부분열과 당파싸움에 힘을 쏟다 보면 대외적 관계에 대해 관심을 둘 눈과 귀를 갖지 못하게 된다.  

 

위기시 현실에 어떤 대응도 하지못하는 사상이나 종교, 철학은 쇠퇴하게 되어 있다. 임진란과 병자호란으로전국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성리학은 더이상 영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성리학은 물락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창립을 가져온 성리학이 몰락한 이유는 형이상학적으로 교조화되면서 권력의 장악,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현실에 맞지않는 공허한 이론까지 주장하여 현실화시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남을 죽이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는 것만이 현실이었다.  

 

한국이 낳은 대 철학가 이황이나 이이의 사상이 더는 조선의 정신사를 떠받치기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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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 성리학은 형이하학적인 땅의 현실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이황과 이이에 벗어나지 못하고 사상의 뜬 구름만 잡고 있었다. 이이의 학설을 비판했다고 해서 정여립은 모반을 했다고 사형까지 당하게 되었다. 조선에 이황과 이이는 철두철미 성역화 되어 있었다. 개혁은 용기 있는 천재 개혁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 정여립

 

 

실학과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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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도 형이상학적인 보편개념이 땅의 현실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유명론이라는 새로운 철학사조에 따라 경험과 개체을 중시하는 용기있는 천재 개혁자인 루터의 한 마디에 그냥 무너지고 만다. 중세의 신학이 허학이었던 것처럼 나라도 구하지 못하는 성리학도 허학이었다.

 

실학은 허학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실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이러한 실학은 실천적인 개신교가 들어오는데 사상적으로 일익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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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과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에 태동한 실학은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지 못하는 경직된 전통 유학으로 전락했고, 조선은 현실에 적용하여 실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학문은 유학 밖이 아니라 유학 안에서 끌어내었던 것이다. 유학은 원래 뜬 구름 잡는 불교와 도교와 달리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공자의 仁과 禮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학은 이전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완전히 결별한 전혀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유학 속에서 민생을 도모하는 실용성을 찾아낸 당대 유학자 지식인들의 자기반성적 고뇌와 노력이 깃든 사상이었다.

 

유학이 원래는 실사구시의 학문이었는데 일부 학자들이 유학을 형이상학으로 등극시켜 형이하학에는 관심이 없게 만들었다. 청이나 일본,서구와의 국제전쟁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철학만 갖고서 싸우는데 한계가 있었다.

 

실학은 사변화된 유학을 실용적인데 관심을 돌리도록 한 것이었다. 반계 유형원, 성호이익, 다산 정약용은 유학에도 능한 선비들이었다. 실학자들은 사색당파로 인해 국가가 허물어 지자. 중국, 일본, 서구의 사상과 문물에 눈을 돌림으로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서구의 서학과 청대의 고증학 등 실천과학을 수용함으로서 당시의 학자들이 천문, 지리, 농업, 역사, 정치사, 법학, 측량 등의 과학적이면서 실증적인 탐구에 몰입하게 되었다. 실증위주의 학문탐구가 특성상 하늘이 아닌 땅의 현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파적 기득권을 유지했던 성리학은 더이상 머물 자리가 없었다. 이러한 실학이 호남에서 기초되고 집성됨으로 인해 실학사상이 훗날 호남인들의 사상적 기초를 놓는데 큰 역할을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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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7(호남편), 실학과 서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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