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7(호남편), 실학자들과 기독교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편집인 | 입력 : 2020/01/22 [16:33] | 조회수: 81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은 도와 예, 인간의 본성에 맞춘 사림파의 철학적인 성리학을 뜬구름 잡는 양반의 학문인 허학으로 판단, 나라를 지켜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고 실제 생활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학풍이 필요하게 되었다. 농업의 경세치용과 상업의 이용후생학인 실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후기는 농촌개조, 경제개조, 생활개조 등 현실적인 삶과 사회, 국가를 개조해야 했다.

 

▲     © 편집인

 

 

▲     © 편집인

 

▲     © 편집인



일본은 일찌기 실학에 탐닉하였다. 도쿠가와(1603-1868) 시대 이래로 유학이 유용하지 않다는 인식이 일찌감치 존재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앞서 실용성과 유용성의 학문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1868-1912) 시대에는 일본에서 계몽가들이 아얘 유학가치를 부정하는 동시에 서양과학의 유용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도 고증학과 양명학을 주자학 대신 발전시키면서 근대화 문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     © 편집인

 

 

조선이 가장 늦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한일합방, 6. 2 전쟁 등 항시 사후약방문이었다. 망할대로 망한 다음에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청과 일본은 사후약방문을 하기 전에 한국보다 한 걸음 앞서서 형이상학적인 유학을 실용의 학문으로 대체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그들은 동학혁명 때 한국에 합법적으로 들어와서 한민족을 학살하고 한국강산을 피로 초토화하는데 앞장섰다. 이미 실용학문으로 인해 신식무기로 무장을 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낫과 곡갱이, 죽창, 부적으로 청일군을 맞섰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양반들의 기득권적 의식과 갑질문화의 유지가 태평천국이라 생각하고 사색당파에 물들다 보니 서구나 외국에 일찌감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가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사후약방문을 하게 되어 17세기 후반부터 실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조선초기에는 주자학이 실학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후반기로 오면서 주자학은 허학이라고 판단했다.

 

기존의 유학은 양반들이나 선비들만의 학문으로 서민들이나 농민들은 사용하기 어려운 학문이었고 피부에 와닿지 않는 뜬 구름 잡는 학문이었고, 라틴어를 몰라서 성경을 읽지 못하던 중세의 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부 양반들만 문자에 눈을 뜨고 일반 서민들은 그야말로 하얀 것은 종이 이고 까만 것은 글씨였다. 전통적으로 관행에 젖은 행위관습만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맹자와 공자왈은 양반들의 형식적인 폼잡기 학문에 불과했고 서민들에게는 생활속에서 발생하는 추수와 관계된 4계절의 철이 문자보다 중요했다. 봄이 되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풍년이 되고, 겨울에는 화투를 치면서 행복해 했다. 

 

서민들은 이처럼 문자보다 농사철에 젖어 있었다. 모내기 김매는 것을 준비해야 하는 때인 절기나 제 철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우수경칩을 알아야 철이 드는 것이었다.  

 

문자를 모르는 농민들은 지적으로는 무지하기 마련이었고 그들이 유학을 공부한다 한들 신분상승도 어렵고, 천성적인 성향으로 먹고 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농촌일만 잘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가운데 실학의 테이프를 끊고 실학을 전개하고 완성한 세 명의 위인들이 있었다. 새만금으로 유명한 부안의 산중턱에서 평생실학을 기초한 사람이 있었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이다.

 

▲     © 편집인

 

반계 유형원

 

 

▲     © 편집인


 

유형원은 1622년(광해군 14)에서 1673년(현종 14)까지 살았던 사람으로서 실학파의 시조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발발하고 부패가 누적되어 적폐청산이 요구되는 시점이면서 전후의 학풍에 대해서 새로운 기대를 하고 있었을 때이다. 조선 건국 이래 누적되어 오던 여러 가지 모순이 극대화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유형원은 이미 여덟살에 이미 서경과 역경을 읽는 천재였다. 이십대에는 과거 공부를 하는 대신 고모부 김세렴이 함경감사로 임명되면서 그를 따라 나서 이북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고통받는 실상을 피부로 느끼고 현실과 실제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금강산을 비롯하여 금천, 안양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향후 실제적인 학문의 방향성을 잡곤 했다. 

 

▲     © 편집인

 

 

게다가 병자호란 이후 삼정(三政)의 문란은 농민들의 삶을 파괴하여 노비나 도적으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유형원은 노비도 사람이라며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그의 개혁안은 혁신적이었다. 

 

그의 불멸의 저서 반계수록은 조선 후기 국가개혁안의 교과서라 평가받을 정도로  그의 개혁사상은 이미 영조 대에 인정을 받아 국정 개혁의 지표가 되기도 했다.

 

책을 1만권 읽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던 유형원은 중국의 경서와 역사서, 속의 논리와 경험, 조선의 역사적 전통을 면밀히 조사하여 조선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반계수록은 토지제도, 노예제도, 교육과 관리선발제도, 관료임용, 관직, 녹제, 병제와 속편, 군현제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사농공상의 사민의 제도의 재정비, 상업과 수공업의 국가적 관리제의 강화 등 국가체제 전반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것이 새만금 부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위대한 실학선구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안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지금까지 국립대학이나 사립대학하나 없는 실정 이다. 실학개시도 그들에게는 허학에 불과했던 것이다.

 

양대전란으로 가장 의미있는 결과물은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부국강병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실학의 태동이었다. 이러한 실학은 성호 이익을 통하여 실학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멀리 떨어진 남도 끝자락인 강진에서 다산 정약용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했다. 

 

성호 이익

 

 

▲     © 편집인


 

성호이익(( : 1681~1763)은 평안도 운산사람으로서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태어났다. 유형원과 이익은 공통적으로 아버지가 유배를 간 학자 출신 집안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학문적 유전자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는 호남사람은 아니지만 유형원의 실학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이익의 아버지는 1678년 사신으로 중국에 가면서 많은 책들을 섭렵하게 되었고, 이익 역시 아버지가 가져온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익은 이황, 이익의 학문을 연구하여 대학자로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여기서 머물지 않고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의 대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유명한 성호사설, 성호문집, 각우록 등의 많은 문서들이 있다. 성호사설은 백과사전처럼 중요한 이슈를 많이 다루었고, 국정전반에 걸친 개혁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문제로는 그가 남인계열이었기 때문에 당쟁의 폐단과 원인을 분석했고, 국정의 최고의결기구인 비변사의 개혁, 의정부의 정비, 겸직의 문제점, 빈번한 관리의 교체, 서리의 폐단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익은 나아가 중국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조선 자주역사관을 중시했고, 풍수지리설, 점성술과 같은 미신성 짙은 학설을 비판하여 유형원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여 체계를 형성했다. 그의 실학 사상은 정약용을 통하여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개신교의 세레요한 정약용

 

조선시대의 실학은 정약용에 이르러서 완성이 된다. 정약용은 17세에 이익의 학설을 접하고 실학에 눈을 뜨게 되어 남도의 맨 끝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약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완성한다.

 

그는 당시 조선왕조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고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로 재편되기를 희구하면서 유형원에  이어 성호 이익같은 실학자들의 학문을 접하고 기독교의 서학을 접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실학을 완성한다. 정약용은 서학을 통하여 서구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실학의 단계를 한층 올려놓았다. 

 

그의 국가개혁의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그의 저서 『경세유표()』에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이 종합된 개혁사상을 전개하여, 통치와 상업, 국방, 정전법을 중심으로 하는 토지개혁, 세제, 관제, 군제, 과거제에 이르기까지 제도를 개혁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술개발을 해서 근대국가에 이르러 부국강병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목민심서, 흠흠심서는 관리들의 개혁을 이루는 책이었다.   

 

▲     © 편집인

 

『목민심서』는 다산 정약용 사상의 정수인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의 핵심이 되는 책으로 " 인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아무리 요순의 법이라도 실시할 곳이 없을 것이다”라는 민본정치 관점에서 눈앞에 병들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긴급히 구호한다는 취지로 엮은 것이다.

 

▲     © 편집인

 

『흠흠심서』는 정약용이 저술한 형법서이다. 이 책은  정약용의 저서가운데 『경세유표()』·『목민심서』와 함께 1표() 2서()라고 일컬어지는 대표적 저서이다.

 

정약용은 조선시대 법문화가 약한 상태에서 형법과 소송법에 대해서 기술한 것이다. 이를테면 살인 사건의 조사, 심리, 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며 허술하게 진행되는 이유는 사건을 다루는 관료 사대부들이 법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관리들의 생명존중 사상이 무디어져가는 것을 개탄하기도 하였다. 정약용은 이를 바로잡고 계몽할 필요성을 느껴 책의 집필에 착수한 것이고, 1819년(순조 19)에 완성 1822년에 편찬되었다.

 

『경세유표』는 앞머리에 “터럭만큼도 병통이 아닌 것이 없는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 라고 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서만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     © 편집인

 

이와같이 목민심서나 흠흠신서가 관리들이 당시의 법체계안에서 윤리의식을 갖고 지방 행정이나 형사 사건 등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상세하고 세부적인 실무 지침을 규정하고 있는 책들이라면, 경세유표는 국가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한 원칙이 보다 근본적으로 제시된 저술이다.

 

이처럼 서학을 받아들인 정약용은 백성들의 인권을 중시하고, 기술을 통한 강력한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법과 원칙, 절차에 다른 형법의 실행을 강조하고, 행정 공무원의 의무와 원칙을 제시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관직 체계의 전면적 개편, 신분과 지역에 따른 차별을 배제한 인재등용책, 자원에 대한 국가관리제 실시, 정전제 토지제도 개혁, 조세제도의 합리화, 지방 행정 조직의 재편 등 이 책에서 제기되고 있는 개혁안들은 서구에서 실현되어 가고 있는 제도적 원칙들이었다.

 

이는 정약용이 청나라와 서학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새로운 근대문명을 일깨우는 제도적 개혁안들이다. 

 

결론적으로 정약용이 기술한 책들은 근대국가를 시작하는 서구의  개혁원리와 주례를 토대로 당시 조선의 법테두리와 현실안에서 정치, 사회, 법, 경제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러므로 그의 유배생활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이 오히려 학문의 장려를 가져와 근대국가를 실현하는데 성큼 다가온 기운을 느끼게 하였다. 

 

정약용은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의 사람이었다. 학문이나 정치, 목회, 정치, 경제, 선교도 죽음을 무릅쓴 인내와 성실, 용기가 있는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다.

 

김대중대통령도 옥중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었고, 그의 옥중독서가 훗날 대중경제론이라는 책을 만들었고, 하버드대학에서까지 채택하는 참고도서로 되기도 했을 정도이다.

 

▲     © 편집인

 

대중경제론은 7대 대선시기에 김대중이 시장 경제의 활성화와 복지의 중시를 골자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경제론이다. 이는 박현채교수의 민족경제론을 수정한 것으로 관치금융 배제, 자율적인 시장경제 진흥, 중소기업 육성, 독자적인 외환정책, 복지 확대, 대중들의 적극적인 경제 참여를 주장했다.

 

1990년대 이후 대중경제론, 대중참여경제론을 전반적으로 보면 일관되게 정부의 시장개입, 관치경제를 배제하고 자유경쟁 시장을 확대하려는 기조가 발견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경제론은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함으로 인해 관치경제가 점점 많아져 사회주의 경제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유배지나 감옥이 때로는 위대한 학자라든지 정치인을 만들기도 한다. 남아공의 만델라는 좋은 예이다. 유배지와 감옥이 때로는 특정인들에게는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정약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배자라는 죄인의 닉내임이 있었지만 사실상 종교로 인한 핍박으로서 양심범이었다. 그는 18세기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다.  정약용, 유형원, 이익의 공통점은 모두 어려서 부터 학문의 천재성을 발휘하였고 일찌기 부국강병을 위하여 실학에 눈이 뜨인 사람들이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태어났다.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을 편찬했을 정도였다.

 

▲     © 편집인

 

 

정약용은 유학과 기독교를 비교하여 성요집요를 쓴 천주교도 이벽으로부터 서학을 소개받고 천주교도가 되었다. 그는 20 대 때 서학에 매혹되었고, 제사문제로 고민하기도 하였지만 천주교도라는 이유때문에 집안이 수모와 박해를 당했고 형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죽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약용 역시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여 유배지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1800년에 정조 사후 그의 인생은 새로운 변전이 발생했다. 정조의 돌연사로 인해 정약용의 인생에도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복이 아니라 화였던 것이다.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형 정약전도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유배지에서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도정환은 부인의 죽음에 대해서 접시꽃 당신을 써 일약 스타가 되어 문재인 정부에서 문체부장관까지 역임하였지만 정약용은 정조의 죽음에 대한 시를 썼다. 

 

빈소를 열고 발인하는 날 슬픔을 적다.
운기(雲旗), 우개(羽蓋) 펄럭펄럭 세상 먼지 터는 걸까 홍화문(弘化) 앞에다 조장(祖帳)을 차리었네.
열두 전거(輇車)에다 채워둔 우상 말(塑馬)이 일시에 머리 들어 서쪽을 향하고 있네.
영구 수레(龍輴)가 밤 되어 노량(露梁) 사장 도착하니 일천 개 등촉들이 강사(絳紗) 장막 에워싸네.
단청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똑같은데 님의 넋은 어느새 우화관(于華館)으로 가셨을까.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의상(衣裳)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궐은 옛 모습 그대로 있건마는 서향각 배알을 각지기가 못하게 하네. [다산시문집 4권] 
 

정약용은 정조가 죽기전까지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기술에도 능하여 배다리와 수원성을 위한 기중기를 설계하기도 하여 기능면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그의 정치관은 민본이었고, 왕정시대에서 주민자치 실현을 요구했던 민주주의를 지향하기도 했다. 이러한 서구사상은 대부분이 서학을 통하여 얻은 지식이었다. 

 

개신교가 1885년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을 통하여 서학이 서서히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천주교를 통하여 서학을 맛본 실학자들은 박해와 핍박을 면하지 못하여 사실상 개신교를 위한 세례요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남의 실학은 개신교를 위한 초석을 낳기도 하였다.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1(호남편)

http://kidogkongbo.com/2013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2(호남편), 차별의 한

http://kidogkongbo.com/2020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3 (호남편), 조선의 개혁자들

http://kidogkongbo.com/2025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4 (호남편), 기묘사화와 기축옥사 

http://kidogkongbo.com/2034

 

나의 신앙유산 답사기5(호남편), 사림과 붕당정치

http://kidogkongbo.com/2038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6(호남편)

http://kidogkongbo.com/2045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7(호남편), 실학과 서학(1)

http://kidogkongbo.com/2049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8( 호남편), 실학과 서학 (2) 

http://kidogkongbo.com/2051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