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8(호남편), 실학과 서학의 만남

예수그리스도의 씨가 서학을 통하여 전래

편집인 | 입력 : 2020/01/27 [07:48] | 조회수: 226

 

▲     © 편집인

 

조선인들과 서학의 만남

 

조선의 왕실이나 실학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했다.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와 당대 최고의 실력가들인 실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이어지고, 사림파로부터 실학이 나오면서 실학자들은 서학을 알게 되고 서학을 통하여 기독교를 접촉하게 되었다.

 

특히 병자호란시 청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천주교신부를 알게되면서 천주교 신도와 천주교 관련 책을 들여오면서 조선에 처음 예수그리스도가 소개된다. 그 이외 실학자들의 학문을 통하여 서학이 소개되면서 천주교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조선은 예수와 서학이 필요했다.

 

조선을 건국했던 실용적인 유학이 정치와 결탁하면서 한편으로는 세도정치를 하는 훈구파로 이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理과 氣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유학으로 지나칠정도로 사변화되면서 국가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유학도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재야에서 노력을 해왔지만 이들 역시 성종 때 정치와 결탁하면서 당파투쟁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조선에 예수는 희망이었고 서학도 근대화로 가는 지름길이 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호국종교로서 유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고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실용적인 유학이 필요했다. 실학자들은 유학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에서 새로운 실사구시의 실용주의 학문을 발견하고자 했다.

 

다행히도 유학은 실천적인 학문이라 실학자들이 유학을 포기하지않고 실용적인 유학을 통하여 실학을 추구하게 되었고, 마침 서학이 실학과 유사하기 때문에 쉽게 서학을 접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와 실학자들은 서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소현세자와 사제와의 만남

 

실학자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보다 현실개혁에 강렬한 의식을 가진 나머지 17세기초부터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신앙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다행히 병자호란은 일국의 왕자가 청에 있었던 예수회 사제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접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1636년 인조시대 병자호란시 청으로 끌려갔던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하면서 서구의 사제인 아담샬과 교제하면서 자연적으로 서학과 서구의 문물을 접하고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소현제사는 청으로 가기 전에 전주에 머물면서 아버지를 도와 작은 조정의 역할(분조)을 하면서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여 재정, 군량, 병마훈련, 병기제조 등의 임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무군사를 통하여 전주에서 왜구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시 호남은 국가의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작은 청와대 같은 또 하나의 조정이 있었던 곳으로 그만큼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전주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수도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소현세자가 베이징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西學)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소현세자는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구의 문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서구의 물품들을 조선에 갖고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가 예수를 알았기 때문에 중국천주교도를 데리고 들어와 포교활동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청에 머물면서 아담 샬과 친하게지내면서 적극적으로 서학의 도입을 꿈꾸었다. 아담샬은 소현세자가 희망하는 대로 서양의 천문학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다. 

 

소현세자는 청에서 처음 서학과 천주교를 알게되었고, 천주상·지구의·천문서 등을 선물로 받았다. 소현세자는 아담샬로 부터 받은 천주상을 벽에 걸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아담 샬 역시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도 하였다. 소현세자는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고, 북경의 천주당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할 정도로 천주교 보급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조선에도 천주교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조선에는 천주교를 통하여 예수가 들어왔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8년만에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오자 마자 2달만에 죽게 된다. 아버지 인조가 아들이 왕이 될 것을 우려 독살했다는 설도있다. 소현세자가 고국에 도착한지 두달만에 너무 일찍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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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와 서학의 만남

 

그 이외 실학자들이 청나라에 가면서 서구의 문물들에 대한 자연적인 관심을 드러내게 되었다. 인조반정이후 실학자들은 중국을 다녀 온 뒤 중국견문록을 쓰면서 서학에 대한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홍대용(1731-1783)은  [을병연행록]을 썼고,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 그리고 김창업은 [노가재연행일기]를 써서 조선시대 3대 중국견문록으로 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이처럼 병자호란은 서학을 접촉하거나 소개받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실학자들에게 서양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18세기에 이르러 성호학파가 성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변화된 성리학은 더이상 조선을 떠받칠만한 명분과 실제적 힘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폐화 되고 황폐화 된  조선에 새로운 부국강병과 민생을 안정시킬만한 새로운 정신사상이 필요했다. 실학이 그 공허한 틈을 메우기 시작했고, 그 중 성호학파는 조선사회의 개혁을 주장했던 실학에 가까운 서학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쉽게 말하면 실학과 서학을 동시에 긍정하였다. 성호이익은 서학만을 중시하였지만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예수때문에 호남강진으로 유배를 갔던 것이다.

 

소현세자와 정약용은 예수를 마음에 담았던 사람들로서 한 때 호남에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分朝의 업무를 보았고, 실학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믿는 신자들은 이미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부터 인질로 끌러갔던 어린아이들이 세례를 받고 들어와 일찍부터 한반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성호학파와 서학

 

성호학파는 서양과학기술에 대해 매료되어 긍정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아가 천주교 교리에 대한 관심까지 갖게되었다. 조선을 개혁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공자왈 맹자왈만 갖고서는 조선을 끌고 갈 수 없었다.

 

구호만 갖고서 한 국가를 끌고 갈 수는 없다. 독재정권하 였지만 새마을 운동이 성공한 것은 "잘 살아보세"라는 사변적인 구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삽과 곡갱이, 낫을 들고 일하면서 실천을 했기 때문이다. 

 

상술했지만 일찌기 중국문물을 경험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사람들이 서구의 문물과 서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서학과 실학이 과학기술과 실제적인 생활면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 생각, 실학자들은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 실학과 서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성호학파는 실학과 서학을 동시에 수용하고자 하였다. 실학과 서학은 조선시대 정조이후 몰락한 양반인 남인들,특히 성호학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주로 남인들이 도입

 

남인은 원래 동인들이었는데 서인 송강 정철에 대한 처벌수위를 놓고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서인인 송강정철에 대해서 처벌을 강하게 하자는 정인홍(鄭仁弘) 등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북인으로 되고 류성룡(柳成龍) 등과 같은 온건한 입장을 주장한 사람은 남인이 되었다. 이황의 제자들은 주로 온건한 입장을 취한 남인이었다. 

 

남인은 한 때 숙종 초기에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1680년 남인의 이환이 서인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몰락한 양반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몰락한 양반들이지만 이황계열의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다.

 

그 중의 하나가 성호 이익이었다.  정조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실학에 가까운 정치를 해왔던 정조는 조선을 이끌고 가기 위한 문명으로서 실학과 서학을 장려하여 한층 발전된 조선을 발전시켜 나갔을 것이다. 

 

조선말기에 유학자들은 국운의 침체를 보고 성리학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새로운 실용학문을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것은 자체적으로는 불가능하여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일찌기 청나라의 고증학의 영향을 받고, 또한 소현세자와 실학자들, 대신들이 서구문물을 도입하는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서학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실학이라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유럽은 14-17세기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으로 중세의 암흑기를 탈출하고 근대적 문화를 정립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지리상의 발견으로 서세 동점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세동점은 기술문명과 천주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자동적으로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한국에까지 전달되었다. 특히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는 서학과 관련한 종교서적으로서 서구의 종교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하였다. 훗날 성호이익은 천주실의를 토대로 [천주실의발]을 쓰기도 했다.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조선에 소개된 서학관련 서적은 약 200여종이 넘었을 정도이다. 그 중 하나가 스페인 예수회 신부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쓴 천주실의는 중국에서 한역된 서학서였다.

 

마태오리치 신부가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유학과 비교하여 서구신학을 유학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토착신학이었다. 천주실의는 천주에 대한 참된 의론이라는 뜻으로 천주교의 주요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저는 중국은 요순의 백성이며 주공과 중니의 학문을 배운 백성으로 천리와 천학은 결코 변하여 뒤섞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간혹(천리와 천학)이 섞일 수 았다고 생각되어, 곰곰히 그에 대한 논증을 하고자합니다.

 

제가 말하는 천주는 옛 경서에서말하는 상제입니다. 고서를 살펴보면 상제는 천주와 단지이름이 다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천을 상제로이해 한다면 말이 됩니다. 천이라는 것은 一大일 뿐입니다. 이가 사물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어제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천리와 천학이 서로 섞일 수 있다는 말은 유학의 중심개념인 천리와 천주교의 천주가 사로 상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테오리치는 천주교를 동양에 정착시키기위하여 동양의 의식과 사고에 따라 토착화신학으로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마테오리치는 중국정부로부터 선교의 허락을 받아냈다. 마테오리치는 拜孔祭祖로  공자를 숭배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까지 하여 선교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토착화신학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천주교, 토착화 신학의 실패

 

이는 동양문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교황청은 이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유럽정통주의 신학을 고집하여 토착화신학을 불신했다. 그러므로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문화에 대한 차이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서구가 유교문화권을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발생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초기 유교문화를 토착화하기 위한 적응주의 대신 토착화를 거부하는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한 원칙주의를 택하였기 때문에 천주교는 조선에서 매우 혹독한 대립과 심각한 고난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다행히도 대한제국이 해체될 무렵에 복음이 들어와 조선왕조로부터의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다.

 

국가의 탄압으로 인해 초기 천주교신자들은 특히 제사문제 때문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심지어 수천명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정약용도 처음에는 천주교를 믿다가 제사문제로 인해 배교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유배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호이익은 천주교의 종교성보다는 서학의 실용주의 학문성만 수용하였다.

 

성호이익과 다산 정약용의 종교성

        

우리는 실학자들을 통하여 서구의 기독교(천주교)가 상륙하여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알 수 있다. 천주교의 종교성을 긍정한 사람은 신서파이고 반대한 사람들은 공서파이다. 당시는 천주교도 마리아를 중시한다든지 마리아에 대한 강조는 나타나지 않았고 순수 기독론과 신론에 대한 교리만을 강조하여 기초복음을 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처음 전달되었을 때와 개신교가 선교사들을 통하여 처음 선교되었을 때의 신앙본질의 내용은 다르지 않았다. 기초복음이기 때문에 신론, 기독론은 동일했다.

 

조선인들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모두 서구에서 온 하나의 서구종교로서 이해한 것이다. 구교와 신교를 구분할 능력조차 없었고, 호국을 위해 서구의 실용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교, 신교를 나누어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호이익은 신앙심을 수용하지않고 서학만 수용하였다.

 

성호 이익(1681-1763)은 반계유형원의 실학을 발전시키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방법론으로 서학을 수용하였고 서학을 통하여 세계관과 사유의 지평을 넓히려고 하였고, 서양의 근대과학기술과 지리상의 발견으로 한층 정밀화된 세계지도와 지리, 천주교의 교리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동양중심에서 벗어나 세계화하려고 하였다. 

 

성호를 비롯한 성호학파들은 당시 잣구적이고 폐쇄적인 주자 성리학을 극복하고 서구의 천문, 지리, 역법, 수학, 측령, 기술 등 과학기술뿐만아니라 서양윤리 등을 수용하는데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조선의 근대화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호는 천주교의 천주나 지옥 등에 대한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판적이었다.

 

성호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천주실의발에서 나타난다. 성호는 천주실의발에서 "천주교에서 천당지옥으로 권선징악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중국에서도 불교가 들어온 다음에 천당지옥설을 긍정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며, 이로인해 천주가 불교를 철저히 배격하지만 결국은 함께 환망한 데로 돌아가고 말 뿐"이라고 하여 천주교와 불교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호는 "아마도 서국의 풍습이 급속히 좋지않게 바뀌어 길흉응보 사이에 높이고 믿음이 점점 사라지게 되니 이에 천주교가 생겨났는데 그 처음은 중국의 시경에서 논하고 있는 바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하여 천주교의 종말론적인 교리를 유교의 것과 유사하게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성호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불교와 유교와 유사한 종교라고 판단하여 일부분에서 수용적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계속)

 

정약용의 서학도입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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