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10 (호남편), 해외로 간 동학

국내에서는 3.1운동, 해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에 영향 끼쳐

편집인 | 입력 : 2020/01/30 [00:59] | 조회수: 61

 

동학의 창도

 

  최제우

 

동학은 경상도 출신 최제우가 순수한 종교적 의도를 갖고 창도하였는데 호남출신 전봉준에 의하여 정치적, 사회적 의도로 변화되어 농민 혁명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의 의미는 여러가지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하늘님이라는 인격신의 개념을 갖게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반외세와 반부패 투쟁을 하여, 훗날 기독교의 신앙을 도입하고 항일투쟁을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동학군의 패망 이후 많은 동학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유일신 개념인 상제와 교회의 신 개념이 유사하여 교회에 나가기도 했다. 일부는 관군과 일본군의 체포를 피하여 하와이, 혹은 멕시코, 쿠바로 떠났다. 

  

희망의 종교, 동학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사회는 왕조의 붕괴와 함께 외세가 여러가지 구실을 갖고 침입하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같은 세상이었다. 조선사회를 정신적으로 지탱했던 성리학적 질서는 무너지고, 자연재해, 전쟁, 신종 코르나와 같은 전염병의 발발 등으로 조선왕조는 총체적인 위기였다. 

 

특히 1842년 아편전쟁 이후 1860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점령은 조선사회의 위기감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다음에는 서구가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찌기 전국을 떠돌면서 다양한 직업과 종교체험을 했던 최제우는 조선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유교질서의 붕괴와 서학의 도래로 보았다. 서학이 들어오면 반드시 뒤에는 총칼이 따라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남미 같은 경우를 보면 천주교 사제들이 먼저 들어가면 뒤에는 반드시 점령군이 따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천주교는 개신교처럼 서구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자생적으로 설립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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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동학을 창도한 이유

 

최제우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사서삼경은 입으로 줄줄 외우고 도덕군자를 말하면서 행위는 실천하지 않아 하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고 했다. 옛날의 바리새인들과 같다. 입으로는 율법을 말하면서 실천을 전혀 하지 않은 형식주의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최제우는 하늘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은 어진 사람들이 궁박하고 못된 사람들이 부귀한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서학은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빼앗게 되는 등 그들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최제우는 천주교는 부귀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하를 정복하여 그들의 도를 포교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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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선사회의 기강이 무너져 사람들이 모두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태와 천주교를 앞세운 서양세력이 강성한 것을 시운으로 보았다. 이는 최제우가 프랑스. 영국의 연합군이 중국을 무너뜨리고 텐진조약을 맺은 것을 염두해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서학의 부국강병을 수용하면서 유불선으로 연합하여 조선특유의 종교를 만들어 나름대로 도탄에 빠진 조선왕조를 종교의 힘으로 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최제우가 서학과 반대하여 동학이라는 이름을 짓지만 서구의 인격신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었다.       

 

최초의 인격신 도입

  

최제우는 <동경대전, 논학문>에서 "내 도는 여기서 받았으며 또 여기서 펼 것이니...도는 비록 하늘님의 도이나 교는 동학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최제우는 동학이 하늘님의 도라고 하여 천주교의 인격신의 개념을 차용했다. 이로서 한국에서 만든 자생종교에 하늘의 인격신이 들어오게 되었다. 

 

최제우는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는 강신체험을 통해서 민중을 질병에서 구제토록 하였고 외국세력으로부터 침략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훗날 전봉준의 동학교도들은 부적을 몸에 넣고 다니면 외적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843년에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을 이끌었던 홍수전(홍수취안)도 최제우 처럼 꿈 속에서 나타난 어떤 노인으로부터  "악마와 사단을 무찌르고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해내라"는 계시를 받고 난을 일으켰다. 그는 꿈속의 노인을 상제, 즉 여호와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홍수전도 당시에 50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최제우는 지금까지 한국의 종교와는 달리 천주교의 인격신을 끌어들인다. 1855년부터 여러차례 신비체험을 하고(도원기서, 19-43) 1860년부터 계속 인격신으로부터 강신체험을 하고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벌였다. 

 

그는 열심기 기도한 결과 하늘님으로부터  "만고에 없고 천추에도 없는 무극대도"를 받게되어 서학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서양세력이 서학을 통하여 강성해지는 것을 시운으로 보았다. 

 

최제우는 새로운 종교의 힘으로 서양세력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무너진 기강을 세울 수 있어야 조선사회가 회생될 수 있다고 믿었다. 동학은 기존의 종교와 차별성을 두었고, 기존의 유교, 불교, 도교외 무교, 풍수와 도참사상, 그리고 천주교를 융합해 놓은 합동이 아니라 통합적인 성격의 종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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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는 동경대전에서 "하늘의 운행과 천지의 순환은 모두 하늘님의 뜻이며 은혜요, 하늘님 조화의 자취"라고 하였다. 최제우는 동학의 핵심사상은 侍天主 라고 하면서 "안에는 생명이 있고 밖으로는 기운과 함께 화합함으로써 이 세상 사람들이 각자 깨달아 이것을 믿는 것이라" 고 하여 동서양의 종교사상이 병합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천주는 서학에서 온 인격적인 신으로 천지를 개벽하고 사람과 만물을 창제하고  주재하시는 인격적인 존재이다. 최제우는 종말론에 대해서도 죽음 이후 인간은 혼과 백으로 나누어지지만 죽은 것은 "백인 육신일 뿐이고, 혼은 죽지 않는다"고 하여 기존의 동양종교개념을 넘어서고 있다. 이는 서학의 영향인 것이다.       

 

동학의 인격신 개념은 개신교 신도가 되는데 유리                               

이처럼 동학이 기존의 유교나 불교, 선이라는 다른 종교와 특이한 것은 천주교를 통하여 하늘님이라는 인격신 개념이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인격신의 개념은 훗날 동학혁명이 끝나고 많은 동학도들이 개신교로 가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늘님 개념은 기존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문으로는 천주로 표현되었고, 내용상으로는 고대 유교의 인격적인 상제였고, 유대교에서 온 유일신의 개념이었다.

 

유일신 사상에 동양의 깨달음과 실천의 사상이 병합되어 신종종교가 탄생되었고, 조선왕조에서는 사교로 몰리기도 하여 최제우는 순교를 당하고 만다. 그래서 敎祖伸寃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교조신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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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신원운동은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으로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달라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바로 동학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최제우의 동학정신은 동학혁명의 종교적,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전봉준 등 호남의 교도들은 ① 동학당을 사도(邪道)로 정하지 말 것 ②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낼 것 ③ 탐학하는 지방관리를 제거할 것 등 3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등 교조신원의 종교운동보다는 반봉건·반외세의 정치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눈엣 가시거리 로서의 동학
 

당시 조정에서 볼 때 동학교도들은 동학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눈엣 가시거리였다. 종교정신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조정이 볼 때는 왕조까지 위협하는 존재들로 판단했다. 

 

광화문 보수우파세력들도 종교정신으로 뭉쳤기 때문에 청와대가 볼 때는 보통 귀찮은 존재들이 아니다. 종교인들은 종교의 정신으로 특정 대상을 향해서 죽기.살기로 싸우기 때문에 조정이나 정부에게 그들은 골칫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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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 당시 양반들로부터 농민들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실학자들이 중시하는 서학과 민중들이 중시하는 불교, 조선유학자들이나 양반들에게 중요한 유교, 하층민들의 샤머니즘 등을 모두 포용했기 때문이었다. 

 

동학은 조정측에서 볼 때는 조선왕조의 국교인 유교를 멀리하고 많은 사람들이 따랐기 때문에 邪交라고 지탄받았지만 동학은 당시 유학자 부터 일반 백성에게까지 폭넓은 신도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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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동학이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나 유교에서 만날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인격신 개념이 가미가 되었고 양반의 종교와 상민의 종교를 모두 포함하였고 나라를 구한다는 호국종교로서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광화문에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의 이름으로 모인 것은 개신교가 호국종교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종교는 항시 정치와 결탁하거나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하여 호국종교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조선의 종교는 호국종교

 

불교, 유교, 동학, 개신교는 고려와 조선왕조에서 호국종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조선은 종교간의 전쟁이 없는 것이다. 종교간의 전쟁은 없고 기득권이나 이해관계의 문제때문에 특정종교 자체안에서 싸움을 하고 있다. 최근 불교의 조계종이나 기독교의 분쟁은 모두 호국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싸우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것이다. 종교가 호국의 역할을 할 때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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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동서의 종교가 병합된 동학은 유교의 병폐로 인한 사회의 혼란, 천주교를 앞세워 외세의 국내진출로 인해 조선 땅의 점거에 대한 경각심, 희망없는 조정과 힘없는 조선의 말기적 증세에 대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여 주었고, 나아가 동학은 외세의 공격까지 종교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구국의 희망의 종교였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경상도 이론과 호남의 실천

 

경상도 출신 최제우의 동학이론은 호남출신 전봉준을 통하여 수만의 관군까지 격파하는 실천적 힘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경상도인은 이론을 정립하고 호남인들은 실천을 했다. 최제우는 동학이 종교로서 남기를 원했지만 전봉준은 국내적으로는 부패한 탐관오리와 관군, 국외적으로는 일본과 청이라는 외세의 투쟁까지 노선을 넓혀 실천에 옮겼다. 청일이 조선 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동학은 관군을 물리치고 새로운 국가를 창도하는 것까지 가능했을 정도이다. 

 

동학은 호남에서 경상도, 이북까지 전국에 퍼져 있었다. 백범김구까지 동학교도였을 정도이다. 영남에서 개시된 종교적 이론이 호남에서는 사회적, 정치적 혁명이론으로 실현되었다. 그만큼 호남사람들은 실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실학의 시작과 완성이 호남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호남은 실천의 땅으로서 자리잡았다.

 

호남사람들에게 이론적 명분을 주어 호남사람들은 그 이론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면 죽기 살기로 싸운다. 호남사람들의 불굴의 정신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그런 결과 왜군은 호남과의 전쟁에서 실패하고 영남에서는 퇴계 이황의 영항을 받아 도와 이론에 밝지만 실천력이 약하여 왜구들에게 길을 내주고 말았다. 왜구는 호남에서 대패하자 영남을 통하여 한반도 땅에 상륙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선조는 북으로 북으로 피신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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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중국 태평천국의 난

 

태평천국(太平天国 / 太平天國, 1851년~1864년)은 중국 청나라 말기에 홍수전이 세운 기독교적인 이념의 신정(神政) 국가였다. 13년 동안 전국에서 50만명 이상이 모여든 기독교적인 이상을 바탕으로 한 십자군 전쟁과 맞먹는 거대한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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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에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어느날 잠을 자다가 꿈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고  태평천국을 선포하고 평등한 지상낙원의 건설에 힘을 쏟고 단체를 만든다. 홍수전이 이끄는 단체의 이름은 상제, 즉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임으로  '배상제회(拜上帝會)'였다.

 

배상제회는 포교활동 1년 만에 2,000여 명을 모았다. 그들은 대부분 농민들로서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렸고, 숯을 굽거나 광산에서 일하는 억눌린 사람들도 있었다. 억압과 착취에 시달린 민중들이 대부분이었다. 홍수전은 평등하고 차별없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자고 슬로건을 걸자, 10년이 지난 1853년에는 전국에서 5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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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은 태평천국을 목표로 하여 1853년 봉기한 지 2년여 만에 남경을 정복하여 천경(天京), 즉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기도 했다. 수십만명이 몰려든 이유는 그만큼 중국인들은 억압과 착취에 시달려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열망과 호응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지상에 태평천국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왕국을 선포한 배상제회는 교단의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교리 정비에 힘을 기울여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건설할 것을 약속했다. 

 

성서의 이상을 중국 땅에 실현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성서의 희년정신을 실천하고 자 했던 것이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이상을 담은 천조전무(天朝田畝)제도를 발표하여 이상사회를 실현하려고 계획하였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상제의 커다란 복을 받아서, 토지가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먹으며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쓰고 장소에 따라 불균형이 있거나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자가 없도록 한다."

 

태평천국 운동이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청왕조와 그 군대의 부패와 무능에도 연유하지만 상위처럼 모든 민중을 평등하게 대하는 평등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리품을 분배하고 조세나 지대를 면제하고 멸만흥한((滿)의 강력한 주장으로 민중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체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1864년, 14년만에 태평천국은 태평지옥으로 바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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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태평천국의 동왕() 양수청()과 천왕()인 홍수전이 대립하고, 동왕에 대해서는 북왕 위창휘()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서서히 지옥의 조김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분열을 보면서  증국번() 등이 조직한 반혁명 의용군[] 등이 1860년에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 영국군과 합세하면서 태평천국을 태평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동학의 종교성과 사회운동의 한계

 

종교의 순수한 정신이 사라질 때 특정한 단체는 17년만에 망하는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동학운동 역시 최제우와 최시형의 순수 종교운동이 전봉준을 통하여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성격으로 변하면서 입지가 상당히 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종교교리 갖고서 농민의 착취와 수탈에 항거하고, 외세에 저항함으로서 호국종교로서 자리매김을 하여 지금까지 동학은 민족종교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만틈 동학운동은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못지 않게 중요한 농민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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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동학에도 기독교의 유신론적 인격신의 개념이 있어서 실학과 서학 못지 않게 개신교를 포교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훗날 교회로 많이 들어왔다. 동학은 인격신의 개념과 반외세투쟁 정신을 심어주게 되어 개신교는 쉽게 상륙할 수 있었고 천도교(동학)와 함께 항일운동을 하는데 연합전선을 펴기도 했고 33인 중에 개신교는 16명, 동학교도(천도교도)들은 15명이나 있었다. 

 

해외로 진출한 동학교도

 

하와이의 동학교도 

 

동학의 인격신 사상은 훗날 동학교도들이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 많이 입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하와이 농장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하와이로 이주한 한국인 제1진 102명이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 캘릭호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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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간 사람들은 56 차례에 걸쳐서 7,000 여명으로 늘어난다. 노동자중에는 중국인, 일본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루트로 밀항선을 타고 하와이로 온 동학교도들도 있었다. 

 

박영보라는 사람은 자신의 할아버지 형제 박기홍, 박기덕씨가 동학교도로서 하와이 농장에 밀입국했다고 하와이 한인회 사이트에 게시한 바 있다http://hawaiihanin.com/immg_history/3606

   

그의 동학교도 출신 할아버지인 박기홍목사는 감리교회 목사로서 하와이에 밀입국 한 이후 훗날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박기홍. 박기덕 형제가 고종 31년 때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다고 했다.  

 

박기홍(朴基鴻 1872~1956)과 박기덕(朴基悳 1879~1926) 형제가 하와이 행 화물선인지 어선인지에 몸을 싣게 된 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하와이 사탕수수 농업이민들을 태우고 제물포항을 떠났던「겔릭호」가 하와이에 도착한 1903년 1월 13일 보다 얼마나 앞섰는지 확실치 않지만「겔릭호」로 들어온 집단 이민 외에도 또 다른 절차와 경로 및 방법으로 하와이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손자의 위치에서 그 뿌리를 더듬어 본다.


그들은 고종 31년 (1894),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계 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에 가담했었다. 소량의 재래식 소총과 죽창으로만 무장된 동학군은 정부군과 일본의 막강한 근대식 무기와 화력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참패를 당하게 된 후 동학군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신을 해야만 했다.

 

물론 이들 형제도 숨어 다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피신 중에 충청남도 예산에서 미국인 선교사 (이름과 종파 미상)를 만나게 되었다. 그 선교사의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그의 알선으로 하와이행 배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은 동학운동은 체제우가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 선(禪)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 기독교)에 대항한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 (天心則人心)을 내 걸기도 했었는데 선교사로서 동학에 가담한 우리 할아버지 형제를 도와준 이유에 대하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형제가 골수 동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배가 어선이었는지 화물선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니 여객선은 아니었고 군산항에서 떠났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그 배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두 아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기억에 남는 것은 단지 일본 국적의 배로 마지막 글자가 로 끝나는 이름이었다는 기억일 뿐이라고 한다.


사탕수수 이민의 경우는 양국간의 정식 절차나 협약에 의해 출항하게 되었겠지만 이 박씨 형제의 출입국은 어떤 절차나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 당시 한국과 미국간의 외교관계나 비자(Visa)에 관한 협정이 돼있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어쩌면 요샛말로 ‘밀항’의 성격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하와이에 도착했고 파할라(Pahala)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사탕수수 농장이민과는 별도로, 그리고 다른 목적(도피)과 절차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들도 역시 우선 다른 사탕수수 이민자들이 농장에서 일을 했던 것처럼 그들의 생계를 위해 파할라에 있는 사탕제조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마 생산 직종이었을 것이다.


기홍씨는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초대해준 Kona에 있는 한국인들의 가정에서 머물기도 하면서 설교도 했었다. 지금은 신학교를 나오고 정식 안수를 받아야만 목사로서의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당시 어떤 절차와 경로를 거쳐 목사가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그의 두 아들도 모른다고 했다.


이 두 형제는 둘 다 30대 전후의 미혼인 채로 하와이에 오게 되었다. 형 기홍씨는 다른 한국이민자들이 그러했듯이 한국의 마산인지 밀양인지에 있던 여인과 사진을 통해 결혼을 했다. 1915년에는 아들 원태(James)가 태어났는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받지 못한 그 여인은 핏덩이인 원태를 남겨둔 채 사망하게 되었다. 파할라에 매장된 산소의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 1940년대에는 묘지 주변이 철 파이프로 표시를 해 놨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뀐 지금 그 자리는 주거지역으로 바뀌어졌고 산소는 찾을 길이 없어졌다.

 

멕시코로 떠난 한인들

 

일부는 멕시코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1905년 4월2일 1033명의 한국인을 태운 영국배 한 척이 인천항을 떠나서 도착한 곳은 미국이 아니라 멕시코 였다. 이 배는 약 1,033 명의 승객을 태웠지만 여객선이 아닌 화물선이었다. 사기 광고였다.

 

1904년 8월 네덜란드-독일계 영국인으로서 멕시코 국적을 소유한 마이어스(John G.Myers)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노동자 모집을 하였다.  중국. 일본 사람들은 멕시코의 잔혹한 노동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하자 한국에 거짓 광고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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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동양척식회사는 수수료를 챙기기 위하여 거짓으로 광고를 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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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는 피신한 동학교도도 있었다. 1,033명으로 남자가 689명, 여자가 127명 , 남자 어린이가 187명, 여자아이가 32명이었다. 멕시코로 떠나 노예처럼 선인장(에네깽) 농장에서 일을 했다. 멕시코 한인들의 일부 300여명이 1909년 4년의 계약이 끝나자 경제난을 이유로 쿠바로 떠나게 된다.

 

그 배에 탔던 한국인들은 그곳이 하와이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착해 보니 속아서 멕시코로 온 것이다. 항해 중 2명의 어린이가 죽어 멕시코 땅에 도착한 1031명. 이들이 멕시코로 건너간 한국이민자들이다. 이들은 노예처럼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 많은 삶을 살면서 사라져갔다. 

 

사기이민을 당한 한인들은 새벽 4시부터 어두울 때까지 쏟아지는 땡볕에서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고 얼굴이 검게 타고, 가시에 찔려 손에서 피가 나기 일쑤였다. 게다가 정해진 하루 일감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채찍질도 가해졌다.

 

참고 견디며 일했지만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임대주택과 식량도 직접 돈을 주고 구입해야 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일을 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나락에 빠졌다. 황성신문 1905년 7월 29일자 사설은 당시 한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했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여기에 동학교도들이 일본군과 관군의 눈을 피해 멕시코로 왔던 것이다. KBS에서도 멕시코까지 동학교도가 숨어서 갔다는 것이 방영되기도 했다. 국내에 있는 동학교도들은 처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일부는 밀항선을 타서라도 해외로 도피했던 것이다.  

 

  © 편집인

 

 

쿠바의 동학교도 임천택

 

당시의 2살 때 멕시코로 떠났던 임천택이라는 사람을 중시해 볼 필요성이 있다. 임천택은 고향은 경기도 광주였고, 97년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에 추서되기도 했다. 

 

 

  ©임천택

 

 

임천택은 경기도 광주사람으로서 그의 아버지가 광화문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에 동참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소천하고 어머니만이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 에네켄 노동에 지원한 것은 자신의 남편이 동학교도였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더이상 살아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황상 주장만 할 수 있다.

 

당시 민족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종훈도 경기도 광주사람이었고, 최제우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호소하는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이종훈은 우선 고향 광주 인근에서 포교활동에 나섰다. 이후 여주, 이천, 충주, 안성 등으로 대상지를 넓혀갔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경기도 광주에도 동학인들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33인 중의 한 사람  이종훈

 

 

쿠바의 영웅, 헤리니모

 

임천택의 아들 헤로니모(임의조)는 1926년 마탄사스의 에네켄 농장에서 노역하던 와중에 태어났다. 22살에 아들을 본 것이다.

 

헤로니모

 

 

그러나 이 아들이 아버지 임천택의 동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쿠바의 카스트로, 국민영웅 체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하여 산업부 차관보까지 올랐다. 그는 당시 산업부 장관인 체게바라와 함께 4년 동안 같이 지내기도 했다. 최근의 헤로니모(임은조, 1926-2006년)라는 영화는 그의 일생을 그려 한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한 변호사가 쿠바에 우연히 갔다가 카스트로에 혁명에 협조한 한인이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큐멘타리 영화로 만든 적이 있다. 헤로니모는 동학교도(천도교)인 아버지의 동학혁명의 피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헤로니모는 1946년 아바나대 법대에 진학한 뒤 5년제 법대 졸업을 1년 앞둔 49년 헤로니모는 학업을 접고 카스트로와 함께 진보정당 ‘오르토독소(Ortodoxo)’에 입당함으로써 바티스타 독재정권에게 본격적으로 저항하는 직업혁명가가 됐다.

 

그는 카스트로와 함께 대학에서 공부하는 친구였다. 카스트로와 10년동안 출생지인 마탄사스 일대에서 도시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등 사회주의 직업혁명가로 활동했다. 1959년 혁명 후 경찰공무원으로 입문해 산업부 차관을 지낸 바 있다. 동학이 주는 영향력은 해외까지 퍼져났다. 동학은 당시 숫자만 해도 20만명 이상을 헤아렸다고 한다. 희망이 없는 곳에 동학은 사회적 혁명까지 가져다 주는 매력적인 종교였다.   

 

동학혁명의 정신이 있었기에 3.1운동의 정신이 가능했다. 쿠바혁명에 동참한 것도 동학혁명의 정신이 있었을 것이다. 호남에서의 혁명정신이 이국 멀리 쿠바에서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는데 동참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호남의 혁명정신이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할 때는 3.1 항일운동에 앞장서게 되고, 사회주의로 무장할 때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도 했다.    

 

 

▲  헤로니모와 체 게바라

 

결론

 

이처럼 동학혁명의 반외세 정신은 사회적으로 3.1 항일 운동에 도움을 주었고, 종교적으로는 유신개념과 종말론적 개념이 있어서 개신교가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동학과 개신교는 구한말에 발생하거나 시작된 종교로서 양측은 종교갈등이 없었다. 호국과 인간을 중시하는 사상, 평등주의, 기적과 같은 공통적인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동학의 시천주, 인내천, 개인주의, 평등주의 등은 개신교와 밀접한 면이 많이 있었다. 호남에서 발생한 순수 민족 정신이 반외세 투쟁에 강력한 정신을 불어 놓었고, 이국 멀리 쿠바에까지 흘러 들어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 편집인

 

 

동학의 정신은 하위도까지 흘러들어가 하위도는 농민들이 350년 동안 조선왕조와 일제와 맞서 땅을 찾기 위해 투쟁을 하였다. 하의도는 17세기 조선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세도가가 농민들이 개간한 토지를 강탈한 이후 땅 주인이 아홉 번이나 바뀌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 편집인

 

 

1914년 2월 20일 일본인 재벌 우콘 곤자에몬(右近權左衛門)이 강압적으로 하의도 땅을 빼앗으려 하자 농민 1000여 명이 목포재판소와 경찰서가 있는 해변에 솥을 걸어 놓고 농성을 벌이며 항거했고 1950년 2월 13일 제헌국회에서 ‘적산(敵産) 불하’의 형식으로 하의도 농민에게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투쟁정신은 훗날 반독재투쟁을 평생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나아가 한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까지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답게 박정희 기념관까지 세우는 등 하여 보복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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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3 (호남편), 조선의 개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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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 답사기5(호남편), 사림과 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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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9(호남편), 실학과 임진왜란을 통한 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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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 10(호남편), 해외로 간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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