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13), 호남으로 간 선교사들

편집인 | 입력 : 2020/03/16 [23:38] | 조회수: 30

호남선교는 미국의 남장로교회 선교사들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들이 들어오게 된 동기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보고로 인해 한국 땅에 사명을 갖게 되었다. 

 

언더우드선교사가  동학혁명이 발생하기 9년 전 1885년에 제물포를 통하여 한국에 들어왔고, 6년 사역을 한 후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그해 9월 미국 맥코믹 신학교에서  한국선교보고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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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훗날 김제에서 금산교회(우리나라 최초의 'ㄱ'교회)를 창립하고 예수병원을 최초로 세운 의료선교사 잉골드여사와 한국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던 신학생 테이트(Lewis Boyd Tate)가 맥코믹 신학교에서 언더우드의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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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감동은 전주에서 서문교회를 세운 레이놀즈(William Davisd Reynolds)와 군산선교를 개척한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에게까지 미쳐 그들은 호남선교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예수의 행전은 이들을 통하여 호남에서 이어져갔던 것이다.

 

남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은 예수의 정신을 전북에서 현실화시켰다. 그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는 등 하여 호남의 근대화 바람을 불게 하였다. 그들은 1892년 'The Missionary'라는 저널에 "우리는 왜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싣기도 하였다.  

 

호남선교 시작

 

이들 외에 매티, 볼링, 레이번, 데이비스 등 4명의 여선교사도 동참을 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7인의 개척자(Seven Pioneers)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아 1892년 11월 3일 제물포 항에 도착했다. 장신대를 설립한 마펫이 이들을 환영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10개월동안 한글을 배우고 1893년 9월에 전주로 내려왔다. 그러므로 호남선교는 1893년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7인의 선교사들은 새문안 교회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1893년부터 호남선교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주스테이션, 군산스테이션, 순천스테이션, 광주스테이션, 목포스테이션을 만들어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선교를 하게 되었다.  

 

이들을 통하여 호남행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즉 예수의 행전이 호남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서울로 컴백

 

호남지방을 선교하기 전에 레이놀즈와 드류(A.D.Drew) 선교사는 1894년 3월 28일부터 5월 12일까지 약 45일간 호남 전지역을 답사하였다. 

 

당시 고종이 개항을하기는 하였으나 서구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 있어서 선교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김제, 정읍, 고창들을 돌면서 선교를 하였으나 동학혁명이 발생하였던 시기인 만큼, 동학의 척외운동으로 인하여 선교는 쉽지 않았다.

 

고부에서 궐기한 동학혁명군이 보국안민, 양이축출을 외치자, 서울의 미국 공사는 선교사들이 속히 서울로 피신할 것을 권면하여 그해 5월 호남의 선교사들은 일단 서울로 이동을 하였다. 선교사들이 떠난 후 전주는 5월 3일 동학혁명군에게 점령당했다.   

       

동학혁명이후 선교사들의 사역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월 10일 발생하여서 1895년 4월에 지도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끝나고 만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호남을 답사할 때는 동학군이 관군에 승리하면서 기세가 당당했을 때이다. 

 

전주에 있었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5월에 서울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12월에 전주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2월에 사역을 시작하게된 이유는 동학이 일본군과 관군에 패하여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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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들은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수는 11만에 가까웠으나 한 달이 지난 11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상당수가 이탈하여 북상한 수는 겨우 1만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 목천 세성산의 전투였는데, 여기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김복명이 붙잡혀 죽고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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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앞에 동학농민은 추풍낙엽이 되었다. 11월부터 동학농민은 일본과 제대로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이들의 일부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통하여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거나 멕시코 에네켕 농장으로 가는 밀항선을 타기도 하였다.   

 

동학군이 12월 일본에 패할 무렵, 서울에 갔던 선교사들이 다시 전주에 와서 복음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전북은 초토화되었고 전염병이 창궐했고, 전쟁의 후유증이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이러한 지역에 선교사들이 와서 예수의 행전을 써내려 갔다. 

 

테이트와 잉골드

 

테이트는 남장로교출신으로서 1893년 전주에 도착했고, 잉골드는 의사로서 1897년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는 한강 이남의 최초의 의사이고 근대병원을 세운 예수병원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잉골드여사가 없었다면 최근에도 하루에 3,500여명씩 찾는 병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남에 오신 예수는 선교사들을 통하여 예수병원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예수의 씨앗을 가진 한 여인을 통하여 농민들의 한을 치유해나갔던 것이다.

 

테이트와 잉골드는 부부였고 모두 의학을 전공한 스마트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때문에 한국땅에서 호남행전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테이트는 한국에 온지 15년이 지나서 1905년 의료선교사 잉골드 여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두 부부가 의료전공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의료선교는 빛을 거두었고, 훗날 전주예수병원을 설립한 산파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 두사람은 전북선교에 혁명적인 역할을 하였다. 호남행전을 써내려가기에 족한 사람들이었다. 테이트는 김제 금산교회를 개척하였고, 잉골드는 전주 예수병원을 개척하였다.

 

미국에서 의학을 전공했던 테이트는 졸업 1년을 앞두고 신학교로 가서 안수를 받고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고, 1893년에 전주에 오게되어, 전주를 중심으로 하여 익산, 정읍, 금구, 태인, 고부, 흥덕, 부안, 임실, 남원 등에서 꾸준히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가 설립한 교회가 78처, 장립한 장로가 21인, 목사가 5인이었다.  세레를 베푼 교인의 수는 1,500명이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1997년 7월 1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된 ㄱ자형 교회건물을 1908년 4월 지역주민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기도 하였다.      

 

            

 


테이트 선교사가 선교 활동을 하면서 조덕삼(趙德三), 이자익(李自益), 박화서(朴化西), 왕순칠(王巡七) 등을 만나 전도하고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금산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금산교회는 마부가 목사가 되고,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33, 34대 총회장이 되었다. 당시 주인이었던 조덕삼은 장로가 되어 이자익 담임목사를 잘 섬긴사람으로 유명했다. 

 

 

 

이자익의 아들은 이규완장로로 훗날 연변과기대 교수가 되었고, 조자익장로의 아들은 조세형 국회의원이 되었다.   

 

     조세형 의원



테이트의 아내 잉골드는 1897년 남장로교로부터 의료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전주에 도착하여 1899년부터 의료선교사역을 해나갔다. 

 

 

 

 

 

잉골드여사는 1902년 보고서에 의하면 6개월 반 동안 1586명을 진료한다. 그녀의 일기를 보면 당시 한인들의 의료상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동학의 휩쓸고 간 지 3년 이후에 진료가 시작되었다.      

 

1899년 12월 14일 그녀는 일기에서 태어난지 3일된 아이가 아프자, 미이라처럼 묶어두는 것이 이 지역의 관습이라고 하면서 아이를 여러개의 끈으로 꽁꽁 묶어서 데려왔다고 했다.

 

1900년 2월의 일기에 의하면 한 여인이 팔아래 거대한 종기가 난 3달 된 아기를 데리고 왔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난후 너무 빨리 사람들이 방안으로 들어와서 아기의 출산을 관장하는 귀신이 화가 나서 그렇게 됐다고 썼다. 

 

1901년 4월 2일 일기에 의하면 4개월 된 아이의 눈이 멀었다. 그 이유는 얼굴에 습진이 났는데 비소가루를 바르다가 그만 비소가루가 눈에 들어가서 눈이 멀었다고 했다. 

 

1903년 10월 14일 일기에 의하면 왼쪽 손 중지가 짤려 관절만 남은 여성에게 물으니 콜레라에 걸린 남편을 위해 중지를 잘라서 피를 마시게했다고 했다. 결국 남편은 죽었다고 했다.   

 

1903년 10월 17일 일기에서는 시력을 잃은 환자에게 시력을 잃게된 이유에 대해서 물으니 어렸을 때 천연두에 걸렸는데 이웃 사람이 물고기와 버드나무를 같이 넣고 끓인 물을 주어서 그걸 먹고 눈이 멀었다고 했다. 

 

1903년 10월 25일의 일기에서는 눈에 왕겨만한 크기의 가시 3개가 박힌 한 소년이 왔는데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소년은 자신을 진료서에 데려다 줄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

 

1903년 12월 12일의 일기에 의하면 거의 죽어가는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그녀는 집을 버리고 나가 다른 집으로 간 남편 때문에 집 귀신이 노해서 병이 난 것이라고 했다는 것.

 

1904년 3월 26일 일기에 의하면 젊은 엄마가 손목에 특이한 상처가 생긴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상처자리에 빨간 모반이 있는데 이유를 물은즉, 어떤 사람이 엄마가 매일 핥으면 없어진다고 해서 매일 정성을 당해 모반의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핥았다는 것이다.   

 

1904년 4월 8일 일기에의하면 한 환자가 모든 약을 바르고 문질러야 하는 약까지 먹어야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래서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  

 

잉골드 여사는 1903년 10월 3일-1904년 4월 30일까지 병원 방문객이 2,107명, 병원 환자수 67명, 왕진 106회, 입원환자 52명이라고 했다. 잉골드 여사의 이러한 헌신이 오늘날 대학병원과 같은 예수병원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샤머니즘과 미신, 잘못된 관습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갖고 농민들을 한명씩 치료해주면서 선교사들을 통하여 예수의 행전을 이어갔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동학난의 한을 치유해 나갔던 것이다. 동학으로 척박해진 피와 한의 땅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물들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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