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목포의 눈물)

편집인 | 입력 : 2020/09/14 [05:36] | 조회수: 159

유달산에서 내려본 목포의 광경은 바닷가에 둘러싸여 고요하면서도 잔잔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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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목포는 바닷물보다 더 진한 눈물이 많이 있다.  눈물의 목포이다. 가수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부를만도 했다. 1970년대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국민가요였다면 1930년대 목포의 눈물도 당시 민족의 심금을 울리는 국민가요 였다. 목포에 가면 이난영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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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목포의 눈물은 음반이 10만장이나 팔렸을 정도로 국민가요였다. 이난영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노래를 불러 일본인들을 깜짝놀라게 했다. 엔카를 부른 계은숙이상이었다. 자녀들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김씨시터즈였다.

 

 

목포는 인천, 부산, 원산항이 개항된 이후 1897년 10. 1. 4번째로 개항된 항구도시 이다. 다른 항구도시들과달리 고종이 직접 칙령서를 내려 만든 도시이다.

 

 고종의 칙령서

 

지금은 서해안도로를 타고 가면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고, KTX를 타고가면 2시간 30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서울에서 3시간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인데 그렇게 눈물이 많은 곳이 목포였던 것이다. 그러한 눈물은 1970년대 독재 정권에 항거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김대중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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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없이는 목포의 역사를 쓸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목포는 눈물의 도시였다. 그 눈물은 목포앞 바닷가의 물보다 더 진했을 것이다.    

 

목포는 고창이나 정읍, 광주처럼 저항과 항전의 도시이다. 1900년도 초반에는 일제에 저항하고, 1970년대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한 그야말로 저항의 도시이다. 지금도 목포 근대역사관에 가면 저항의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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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근대역사관에 들어가면 목포의 눈물을 흘리게 한 목포 부두노동자 파업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이 당시에 유진벨이 목포에 처음 들어왔을 때이다. 유진벨은 목포 부두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목포의 눈물을 씻어주기 위하여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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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이 목포에 상륙하던 해 1898-1903년까지의 목포 부두노동자들의 투쟁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동맹파업이었다. 1898년과 1901년에 일어났던 세차례 투쟁은 임금과 관련한  것이었고, 1903년은 제국주의와 친일파에 대한 투쟁이었다. 목포항이 개항한지 5개월만에 1898년 2월과 9월에 투쟁으로 나선 것이다.

 

부두노동자의 눈물

 

이러한 투쟁은 동학이 끝난 지도 3년정도 밖에 안되어 동학정신으로 농민들이 투쟁에 나선 것이다. 자금수탈과 항일운동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동학의 정신은 목포의 부두노동자들에게 이어져 항일정신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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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노동자 동맹파업으로는 전국 최초로 일어난 것이었으며 일본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당시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노동에 시달렸음에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항의했다.

 

일본인 자본가들과 고용청부업자들은 농한기에 일거리를 찾아 부두로 나온 농민들을 끌여들여 부두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으려 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도중(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조선인들과 일본인 거류지 사이의 교통을 막고, 일본거류지 출입을 막고, 상행위를 금지시켰던 것이다. 부두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하여 임금착취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1903년 목포 부두



1903년 부두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중재 역할을 한 십장에 대해 반대 항의 투쟁을 하였다. 이들이 중간 브로커로서 임금착취를 하였기 때문이다. 반십장운동에 나섰다. 10%의 소개비를 20%로 올리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부두노동자들은 십장이 임금착취자로서 자신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십장들은 일본인 자본가와 순사와 연대하여 부두노동자들이 일본패를 차도록 탄압하고 강요하였지만 부두노동자들은 무안감리서가 만든 패를 차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1903. 11. 16. 노동자들은 "우리들은 모두 대한 인민이다. 우리는 감리서가 만든 패를 찰 뿐, 일본패는 찰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동학혁명의 정신을 갖고 일본인 거류민들을 배척하는 격문을 뿌리고, 일본자본가 앞장을 서는 친일파 십장들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일본경찰이 부두노동자들을 핍박하자, 목포주민들까지 나서서 부두노동자 편에 섰다. 12/14일 급기야 일본 군대가 들어와 이들을 제압하고, 일본패를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던 11명에 대해서는 끝내 체포가 이루어졌다. 

 

결국 목포부두노동자들의 투쟁은 일본의 무력간섭과 봉건정부의 굴욕적인 협상으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목포부두노동자들은 투쟁으로 생존권을 수호하여 어느정도 권익을 찾았고, 일본자본가들에게 타격을 입혔던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부두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빵과 쌀의 문제를 넘어서 값싼 노동력으로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제국주의 자본가들에 대한 반제국주의와 항일운동의 성격으로서 자리잡는다. 

 

부두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처럼 일을 했다. 부두노동자들의 점심식사는 엿을 먹거나 물로 배를 채우기가 일쑤였다. 하루 10시간씩 일해서 받는 일당이 5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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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가마가 1,350 전인데 한달 임금은 이것 저것 떼고 600 전에 불과했다. 한달 죽도록 일을 해야 쌀 한가마도 사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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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은 하루에 10시간으로 거의 중노동이었다. 부두노동자 수는 1900년 200여명, 1902년 300여명, 1903년 5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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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노동자 중에는 쌀의 용량을 재는 두량군(斗量軍), 선박과 부두 사이에서 하물을 싣거나 내리는 칠통군(七桶軍), 한국 선박의 적하물을 내리는 하륙군(下陸軍)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량에 따라 임금을 받았는데,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일한 임금으로 평균 쌀 4되를 구매할 수 있어서 3~4인분의 식사를 해결할 정도였다.

 

어떤 인부는 너무 배가 고파서 쌀 몇 컵을 훔쳤다가 일본 사람한테 맞아죽기도 하였을 정도이다. 1903년까지 일어난 동맹파업은 점심을 물로 채웠던 노동자의 임금을 깍어서 이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문제를 노동자편에서 해결해 주는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천재 관료사이자 사업가이며 학자인 김성규였다.

 

무안감리사 김성규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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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고종이 칙령으로 필요에 의해 개항한 최초의 항구다. 대한제국은 목포와 증남포의 추가 개항으로 관세 수입을 늘려 정부재정을 확충하고자 했다. 목포 개항과 함께 무안감리서와 목포해관도 설치했다.
 
당시 목포는 무안에 속해 있어 무안감리서가 설치됐고, 감리서는 개항장 내 외국 영사관과 외교ㆍ통상 업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내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무안감리사 초정 김성규는 농업과 사회개혁의 선구자로 주목받았고 일제를 끼고 하는 갑신정변파도 거부하였다. 초정은 1887년 광무국(鑛務局) 주사(主事)로 관직에 입문하여 고창군수, 장성군수, 무안감리를 거쳐 1905년 강원도 순찰사(巡察使)의 임무를 마칠 때까지 18년간 관계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늘 농민들편에 서서 일을 하였을 정도이다. 

 

그가 1903년 무안 감리(監理)를 지낼 당시 목포,장성 등지에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사업에 힘썼으며, 목포부두 노동자 파업과 관련하여 일본 영사관 상인들과 대립하였으며, 지역유지로서 많은 사회활동을 펼쳤다.

 

처음 1898년 2월 일본인이 임금 지불의 표준을 정하기로 협정을 맺자, 한국노동자들이 동맹파업과 시위 등으로 7일간 대항했는데, 양국 상인의 협의로 사태가 겨우 해결되었다.

 

같은 해 1898. 9월에는 한국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여 10일간 동맹파업을 벌였지만 이번에도 양국 상인의 노력으로 사태가 해결되었다.

 

특히 무안감리사 초정 김성규가 적극적으로 노동자의 편을 듦으로 해서 그들의 문제는 잘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는 고창에서 현감으로 역할을 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의 뒷수습까지 감당하였다. 

 

김성규는 나중에 대지주가 되었지만 공직에 있을 때, 전봉준과 전주화약을 맺기도 했고 집강소를 설치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한 개혁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손자는 훗날 서울대 교수가 되었을 정도로 그는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과 함께 집강소를 만드는데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농촌개혁에 앞장선 천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목포(당시는 무안)에 무안의 감리사로 와서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의 편에서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데 앞장을 선 것은 국가 관리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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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섣규는 관직을 은퇴하고 그가 투자한 자본으로 사업을 하여 그는 거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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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도 목포의 조선인 지주에 김성규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사업을 해서 성공을 했다. 그는 거부가 되어 학교를 세우고 농촌개혁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유한양행의 유일한 같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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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을 닦으로 온 유진벨

 

유진벨은 동학혁명이 끝난 이후 1895년에 한국에 들어와 나주에 선교를 하려고하였지만 반대에 부닥쳐 나주선교를 포기하고 목포로 행했다. 목포의 역사는 유진벨 없이 근대역사를 쓰기 힘들정도로 유진벨은 목포의 눈물을 씻어주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목포의 부두노동자파업을 보면서 인권, 전문 기술로서 목포주민들이 보다 업그레이드 되어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요망, 학교와 교회를 짓기로 하였던 것이다. 식민지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대식 교육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일념을 갖고 여학교와 남학교를 세웠다.   

 

유진벨은 1897년 목포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목포진료소(1898)와 양동교회,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등을 세웠다. 유진벨 등 미국선교사를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명과 미국이라는 신세계는 조선신분사회에서의 탈출을 노리는 하층민과 직업군인들, 신세계를 동경하던 어린 여자들에게 꿈을 안겨주었다.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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