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영암, 영광편)

좌익과 공산당에 의해 죽은 교인들

편집인 | 입력 : 2020/10/29 [01:55] | 조회수: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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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영암편

 

호남은 한과 눈물의 땅이다. 여수, 순천은 여순사건으로 인해 많은 민중들이 죄없이 죽어갔고, 장흥은 동학난으로 인해 동학농민들 수만명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영암, 영광은 좌익들과 공산당으로 인해 많은 교인들이 순교했다. 특히 영암이나 영광은 좌익으로 유명했던 김삼룡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김삼룡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노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로 활약하는 등 이주하(李舟河)와 함께 지하조직에 몰두한 북한에서도 조만식과 교환을 하자고 했을 정도로 유명한 좌익운동가였다.

 

김삼룡

 

김삼룡은 1939년 출옥한 박헌영의 지도를 받아 경성전기·대창직물·경성방직·용산철도공작소·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을 확장하는 좌익 활동을 보이기도 했고, 1940년 12월에는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다. 일제도 공산당이나 좌익은 싫어했기 때문이다.  

 

김삼룡은 1945년 8월 15일 전주형무소에서 출감하자 마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서 조직책임을 맡았고, 9월 11일에는 재건 조선공산당의 조직국책을 맡았으며, 1946년 2월 15일 좌익단체의 연합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하는 공산주의자로서 좌익활동을 하였다. 좌익과 공산주의는 백짓장 하나 차이 였다.    

 

김삼룡은 1946년 9월 박헌영·이강국 등 남한정부에 의해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기도 하였지만 1946년 11월에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동하여 출범한 남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조직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즉 남로당 회원이었다.   

 

김삼룡은 1949년에는 불법화 된 남조선노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공산주의자였지만 1950년 3월 27일에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에서 자생한 공산주의자로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좌익활동 영향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들의 영향으로 많은 교회가 파괴되거나 신도들이 순교를 당했다.

 

오늘날도 좌익들은 교회를 파괴는데 앞장서고 있다. 대표적인 언론이 뉴스앤조이와 CBS 이다. 이들 언론이외에도 예수의 영이 아니라 좌익의 영이 들어간 사람들은 교회를 파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전남의 영암과 영광은 좌익과 공산주의에 의하여 많은 신도들이 희생자가 되어 순교를 당했다.

 

전남 영암은 남도땅의 소금강으로 월출산 아래에 그 어떤 힘으로도 옮길 수 없는 신기한 바위가 있다고 해 신령한 바위라는 뜻의 영암이라 불리웠다. 

 

영암 순교자들의 교회

 

영암지역에는 목포선교부 니스벳(John Samuel Nisbet, 한국명 유서백) 선교사에 의하여 1915년에 복음이 전파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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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영암읍교회가 세워졌다. 니스벳 선교사는 1869년 미국 남캐롤라이나주 행케스터에서 태어나 1898년 노스웨스트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1907년 38살에 선교사로 지망하고 내한하여 전주에서 선교 사역을 하였다.

 

1911년에는 목포 선교부로 와서 사역하는 중 1915년에 영암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세운 교회가 가장 많은 순교자를 냈다.

 

해방 이전에 영암 일대에는 17개 교회가 세워져 있었지만 6·25 당시 공산군에 의해 19 50년 9월말부터 10월 사이 87명이나 되는 많은 교인들이 학살되었다. 

 

특히 영암군내 8개 교회에서 공산군에 의해 비참하게 학살되었다. 영암읍교회 24명, 구림교회 19명, 상월그리스도교회 30명, 천해교회 6명, 매월교회 3명, 삼호교회 2명, 독천교회 2명, 서호교회 1명 등 총 87명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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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기독교연합회는 2000년에 87인 순교자기념비를 세웠으며, 2006년에 군의 지원을 받아 군서면에 영암군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세웠다.

 

6.25 전쟁동안 전남 영암지역이 좌익과 공산당들에 의하여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였다. 1974년에는 무덤 곁에 ‘순절비’가 세워졌고, 2000년이 되어서야 이들처럼 전쟁 중에 순교한 87명의 이름을 새긴 순교비가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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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읍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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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 좌익과 공산당들은 이념의 우상에 빠져 영암읍교회에서는 김동흠 장로를 비롯한 24명의 교인들을 4차례에 걸쳐 학살했다. 묻지마 학살이었다.
 
좌익들은 예수믿는 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산주의의 유물론에 반대된다고 판단,  빨랫줄로 사용하던 철사를 사람들의 손바닥에 꿰어 야산으로 끌고 가서 학살했다.
 
유물론자에게 유신론자는 공공의 적이었다. 순교비는 유물론자들의 잔학상을 드러내 주면서 당시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달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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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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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교회는 1913년 7월 영암군 학산면 지소마을에서 세워진 지소교회가 그 시작이다. 당시 이 교회를 세운 이는 전도부인 나옥매 였다. 나옥매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신덕철 전도사 가족과 전도부인 나옥매 가족등 35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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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교회는 원래 장로교회였는데 6.25전쟁시 교역했던 전도사가 사망하는 바람에 그리스도의 파로 교단을 옮겼다.

 

매월교회

 

 

  매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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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교회에서는 15살 소녀를 포함하여 세 명이 순교를 당했다. 공산당들은 이념앞에 사람들의 생명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이념으로 덮어버렸다.  

 

매월교회에서는 박희서 장로(광주계림교회) 모친인 임자임(45세)집사를 재판도 없이 공중 앞에서 흉기로 치고 찔러서 공개적으로 살해함으로 순교를 당했고, 이태일 성도(55세)는 일반 우익인사들과 함께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그 다음에 공산부락 야산에서 두 손이 묶인 채 죽창에 찔려 시체가 되어 있었다.

 

함께 따라갔던 이양심(15세) 소녀도 행방불명이 되었다. 좌익들은 죽창을 갖고서 신도들을 '묻지마 찔러'로 살해하였다. 


삼호교회

 

  삼호교회

 

삼호교회는 성도 김상규 씨와 성명 미상 1인이 공산당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이처럼 좌익의 영이 깃든 사람들은 교인이나 교회를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있다.

 

1950년 10월 추수기에 목포양동교회 고 김제환 장로의 외아들 김상규 군(당시 고려대 재학 중)이 완도 외가에 피신해 있다가 성명 미상의 친구와 함께 목포에 가려고 삼호면에 와서 용당리 뒷산 길로 바다를 향해 가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친구는 바닷가에서 총살되었다. 

 

김상규는 심한 구타를 당하고 인근 저수지로 끌려가서 돌에 매달려 수장 당했다.

 
좌익과 공산당들은 자신들과 다르면 사람의 생명을 휴지조각처럼 여겨 생명을 경시여기고 있다. 약 10일 후에 현 박영종 장로 부친이 이를 알고 시신을 인양하여 가매장을 한 후 그 후 김제환 장로 가족이 이장을 해갔다.

 

그리고 6년이 지난 후 아들이 피 흘려 순교한 것을 기념하여 교회를 세웠고 그 삼호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서호교회

 

 서호교회

 

 

서호교회 교역자 노홍균전도사는 1915년 6월 26일 전남 영암군에서 출생하였으며, 목포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였다.

 

6.25 전쟁 당시 목포노회 파견 전도사로 해남군 구림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가 은신하기 위해 고향으로 왔다가 빨치산들에 의해 죽창과 농기구로 처참하게 살해당하였다. 

 

노홍균 전도사는 독천교회(영암군 학산면에 소재), 성전교회(강진군 성전면에 소재), 서호교회(영암군 서호면에 소재), 구림교회(해남군 화원면에 소재) 등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며 전도사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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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홍균전도사

 

 

독천교회

 

독천교회

 

독천교회는 그 전신이 었던 월창교회로 미암면 월창리에서 6.25를 맞이했다. 독천교회 예배당은 신축하여 2년도 못되어 인민군에 의해 불살라졌다. 그 당시 목조건물이던 교회당은 석유까지 부어 순식간에 불태워졌다.

 

교인들은 두려워 숨고 흩어졌으며 당시 유년주일학교 교사와 청년회 회장으로 봉사하던 정길성 성도가 편모슬하에서 열심히 교회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붙잡아 동구 밖으로 끌려가 순교를 했다. 그 후 약 5년 후에야 바로 이웃인 독천에 교회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

  

 구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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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시 인민군 공산주의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 신부, 장로, 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구림교회에서만 28명이 순교를 당했다.

 

1950년 10월 5일,. 점령군에서 패잔병 신세가 된 무안 일대의 빨치산이 월출산으로 은신처를 옮기면서 구림교회당을 불태우고 당시 구림교회 교인과 우익인사 28명을 색출해 인근의 초가 주막으로 몰아넣어서 불태워 살해를 하였다.
 
그들은 예수믿는 죄밖에 없었다.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은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좋아했고, 사람을 죽이면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B. 영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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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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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은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3대 종교 성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염산교회와 야월교회의 순교를 잊지 못한다. 이 곳 영광은 유진벨선교사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된 곳이다. 야월교회는 1908년 4월 5일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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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공산군이 전교인 65명을 모두 산채로 매장 되거나 수장되어 죽임을 당하고 교회와 성도들의 집이 불태워졌던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순교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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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월교회서 은퇴한 최종한 장로는 당시 자신은 10살이었고 자신이 죽지 않은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고 당시의 광경이 생생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좌익의 후손들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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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남쪽 까지 쳐들어온 인민군은 7월 말 인민군이 영광지역을 점령했다. 자생공산당들인 남한의 좌익들은 죽창을 들고 야월교회를 인민의 원수로 지목하고 가혹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 죽창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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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9.28 수복과 함께 교회도 자유를 되찾고 야월교회 교인 들은 대대적인 국군 환영행사를 준비했다.

 

러나 당시 영광은 광주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 박헌영과 그 수하 조선공산당 조직책 김삼룡 등의 영향으로 좌익들이 많았다. 서울수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퇴각을 하면서 인민군 잔당들과 좌익들이 죽창을 들고서 '묻지마 살해'를 하였다.

 

염산교회


좌파적 이념의 노예들은 신자와 교회를 파괴하고 죽이는 것에 대해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인민군과 좌익 잔당들은 국군 환영행사에 나선 기독교인 학살을 자행했다.

 

정문성과 일가족, 영수 김성종과 조양현 일가족, 집사 최판섭과 일가족 등 교인 65명이었다. 주민 80여명도 희생됐다. 염산교회 신도들에 대해서는 간척지 수문에 돌을 매달아 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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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산교회

 

 인민군잔당들과 자생공산당 좌익들은 무자비한 사람들이었다. 이념앞에 생명은 파리 목숨과 같았다. 그들은 피를 맛보어야 직성이 플리거나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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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영이 온몸과 마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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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과 산에 구덩이를 파고도 죽였다. 야월교회에서 6㎞ 떨어진 염산교회 교인 77명을 돌을 목에 매달아 수장되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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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어서도 말하였다. 영원히 죽지않는 곳에 갔기 때문이다. 좌익과 인민군들은 사람을 죽이고 교회를 파괴하는데 희열을 갖지만 예수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데 앞장을 서는 사람들이다. 기독교는 피와 눈물의 역사이다.

 

아무리 좌익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핍박하고 박해해도, 유물론자들은 유신론자들을 앞설수 없었다. 그들은 육을 죽일 수는 있어도 영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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