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통합, 중세로 가다(2)

철학적인 중세, "세속적인 교회 다시 중세로"

기독공보 | 입력 : 2017/08/04 [05:03] | 조회수: 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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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교단, 다시 중세로

 

총회가 중세로 가고 있다. 중세로 가고 있다는 것은 시간적, 교리적, 제도적 중세가 아니라 철학적 중세를 말하고 있다. 철학적 중세라 함은 실체와 상관없이 보편이름이나 보편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실재론을 채택한 중세를 말하고 있다. 신, 교회, 사제, 교리는 개체나 경험, 감각을 중시하는 것보다 손에 잡히기 어려운 형이상학세계의 보편자에 불과했다. 즉 중세는 신의 이데아, 교회의 이데아. 사제의 이데아, 교리의 이데아라는 경험하기 어려운 가치의 세계인 보편자를 만들어놓고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철학에 입각하여 암흑의 시대를 끌고 간 것이다.

 

중세의 몰락

 

당시는 이름과 명목, 개념만 존재하는 암흑의 시대인줄 몰랐지만 개체와 경험, 사실이 중시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이름과 개념만이 지배하던 시대가 암흑의 시대인 줄 알았다. 즉 중세는 보편자와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철학에 의해서 끌려가는 사회였다. 보편신, 보편교회, 보편사제, 보편교리라는 형이상학적인 체계에 의해서 운영되는 사회였다. 인간의 영적 무지와 지적 무지로 인해 형이상학적 세계는 자그만치 900년 동안 유지되었다. 16세기가 되어서 기독교세계가 허구에 의해서 이끌려지는 사회라는 것을 알았다.  오캄과 같은 유명론자들은 중세를 이끌고 가는 실재론자들에 대해 경험하기 어려운 이름과 개념뿐인 사회라고 비판하자, 중세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자들의 업적

 

루터는 유명론의 영향을 받아, 보편신이 아니라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개체의 신, 보편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개체교회, 신의 대리자로서 보편사제가 아니라 신의 제자로서 개체 사제들, 경험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가치의 보편교리가 아니라 성서와 믿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사실적 교리를 추구한 것이다. 의인은 형이상학적 교리를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경험하는 사실을 토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경험도 불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룩한 최대의 업적은 하늘의 형이상학적인 보편개념을 땅의 경험적 개념으로 사실화한 것이다. 

 

개신교의 교회, 사제, 교리 개념

 

개신교가 생각하는 교회는 카톨릭의 이상적인 보편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였고, 개신교의 사제개념은 하늘의 이데아속에 머물러 있는 보편개념의 사제가 아니라 땅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희생하고 고난당하고, 순교하는 현실적인 개별자로서의 사제였고, 개신교의 교리는 하늘에만 머무는 형이상학화 된 보편교리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삶으로 연결되는 신앙고백으로서의 삶이였다. 그래서 신학을 체계화 한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라고 했다. 개신교도에게 있어서 그것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자 신앙고백이었다.  

 

한국의 개신교, 중세로 가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는 보편적인 중세의 이데아적인 교리를 갖고서 중세가 하듯이 똑같이 이단정죄를 하는데 앞장섰다. 신학을 갖고서 신앙고백을 판단한 것이다. 이는 중세의 암흑의 영의 부활이었다. 개신교의 이단정죄는 신앙고백을 갖고 이단으로 정죄해야 하는데 중세의 형이상학적 보편교리를 갖고서 이단정죄하여 개별자들의 신앙고백의 자유를 훼손했던 것이다. 실제적인 신앙고백을 형이상학적 교리로 매도한 것이다. 교리로 이단정죄한 중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역대 총회장들, 중세로 가다

 

불행하게도 예장통합교단도 중세로 가고 있다. 예장통합교단의 역대 총회의 주제를 보면 현실과 사실, 경험, 실천성 없이 보편적인 명목과 이름, 보편적인 개념만 존재하는 것이다. 

 

 "거룩한 교회에서 다시 세상속으로", "다시 거룩한 교회로" 등 그 이하의 표어를 보면 대부분 이름과 개념에만 머무는 실천불가능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대부분 총회장들이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불가능한 이름과 개념만의 주제를 내세웠고, 거의 실천하지 않았다. 

 

거룩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작년 총회나 금년 총회는 거룩해지기는 커녕 재판국에서 나타나듯이 점점 중세로 가고있다. 형이상학적 법리와 조항만 갖고서 재판하고 판단하여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 이대위는 지금까지 신앙고백적 기준이 아니라 중세처럼 보편교리적 기준으로 판단해왔다. 예장통합교단이 여전히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제도적, 교리적 중세는 아니지만 철학적 중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인 교회 다시 중세로"

 

금년의 총회주제는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속으로" 이다. 예장통합교단은 거룩해 본 적이 없는 데 어떻게 세상속으로 다시 들어가는가? 중세의 실재론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신학의 부재에 기인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가 아니라 "우리는 중세로 간다"이다. 차라리 금년표어를 "세속적인 교회 다시 중세로"가 어떨까 한다. 역대 총회장들의 총회주제를 보자. 대부분 이름뿐인 주제로 중세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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