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교회 12년 종교전쟁 끝내

명분도 실리도 없는 추악한 싸움...결과는 백석 광성. 통합광성으로 분리

기독공보 | 입력 : 2016/12/19 [23:09] | 조회수: 2048

광성교회 사태가 분쟁이 시작된 2004년 시작된 이래 12년만에 양측의 합의로 분쟁이 끝이 났다. 이성곤목사는 영원히 광성교회를 떠났다. 이성곤목사의 신화는 깨졌고, 그에 대한 반대파의 세가 너무나 강해졌다. 당회도 양측으로 나뉘어졌다. 소송패소와 사면불가의 후유증이다.

 

백석광성은 건물교회를 떠나는 조건으로 100억, 교인지위를 얻은 사람의 숫자를 계산하여 + @ 를 받기로 했다.  쉽게말하면 교인지위를 얻은  4,000여명  중 나가는 숫자를 판단하여 +@를 받기로 했다. 그렇다면 백석광성은 약 150억 이상 거뭐지게 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거나 임대를 하기로 했다. 백석광성은 약 3,000여 명이고, 통합광성은 약 1,000 여명 이다. 통합광성은 매달 이자를 1억이상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위치로 전락했다.  건물을 팔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이자 이다.

 

동남노회와 사면위원, 용서대신 정죄를 선택

 

이외에도 통합교단은 이성곤목사를 사면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3,000 여명의 광성교인과 수십억의 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00회 총회시 이성곤목사와 부목사들은 사면신청을 하였으나 동남노회와 전 광성교회부목사출신인 사면위원회의 한재엽 목사 등이 적극 반대하여 이성곤목사와 광성교회 부목사들은 사면에 실패했다. 이들에게 용서는 없었다.

 

이러한 파장으로 인해 이성곤목사의 반대파가 득세하면서 이성곤목사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고, 당회도 이성곤목사 지지파 반대파로 나뉘면서 대립 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다. 사면실패의 후유증은 이성곤목사 반대파에게 세를 실어주게 되었다. 사면파동의 후유증이다. 오히려 이성곤목사반대측의 L 목사가 담임목사를 하려고 하였지만, 지지세의 약화로 인해서 교회내 주도권을 잡는데는 실패했다. 

 

남성신도는 대다수 이성곤목사 반대, 여성신도는 지지

 

주로 남선교회원들은 이성곤목사를 반대했고, 여성들은 이성곤목사측을 지지했다는 것. 그러나 워낙 이성곤목사의 반대세력이 심해서 이성곤목사도 더이상 버티기도 힘들었다. 이는 이성곤목사가 평상시 강공책을 쓴 것이 교인들의 불만을 사왔다. 이성곤목사는 법적인 문제이외에도 오랫동안 강단을 비우니 반대측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신도들은 이성곤목사를 지지하여 결국 이성곤목사의 라인인 박재신목사가 1년자리 임시 담임목사를 맡게 되었다.

 

박재신목사 시대 열려

 

이성곤목사 반대측인 이한우목사와 이성곤목사측 박재신목사가 담임목사경선을 하여 57대 42로 박재신목사가 다수를 얻었고, 다시 최종 박목사가 2/3를 얻어서 담임목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담임목사는 기존의 힘있는 담임목사가 아니라 주일 대예배 설교도 하지 못하고 설교도 돌아가면서 하는 형식상의 담임목사이고 교회분리시 도장을 찍는 행정목사에 불과했다. 결국 박재신목사 이하 당회는 통합에서 사면이 되지를 않으니 백석행을 택하였다. 채영남총회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탈을 막고 사면을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반대파들의 반대로 인해 역부족이었다.   

 

결국 통합교단은 사면반대로 인해 3,000여명의 신도와 약 150억이상의 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성곤목사의 무릎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교단이 신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의 정신은 통합교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사라진 바리새적 교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교단은 김창인목사앞에 눈물지으면서 용서해달라고 무릎꿇은 이성곤목사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성곤목사의 사면에 대해서는 김창인목사 휘하 부목사출신들과 동남노회가 입에 거품을 물고 사면반대를 해와 채영남총회장은 사면을 할 수가 없었다. 

 

이성곤목사는 괘씸죄로 사면이 불가능 하였다. 채영남목사만 벙어리 냉가슴을 하며 답답해 했던 것이다. 원로목사 앞에 눈물흘리며 무릎꿇은 한 목사가 통합교단에서 정치적으로 죽고 목회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통합교단에서는 눈물과 회개가 통하지 않는다. 오직 정치적인 힘, 침묵과 눈치이다.  

 

동남노회와 통합교단에는 용서가 없었고 모두들 이성곤목사에게 돌만 들고 달려만 들었고 누구하나 돌을 내려놓는 사람 하나 없었다. 회개하는 자에게 돌을 든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정죄의 댓가는 백석의 몸집만 부풀려주었던 것이다. 일단 용서대열보다 예수의 정신에 반대되는 정죄대열에 앞장섰거나 눈치만 보았던 사람들은 교단의 어떤 보직도 맡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정신이 사라졌고 바리새인들의 정죄 정신에만 앞장섰기 때문이다. 김창인목사 세력들은 이성곤목사의 손발을 묶어놓았다.

 

사면파동과 광성교회 사태로 인해 통합교단과 동남노회는 '다시 거룩한 교회로'가 아니라 '다시 정죄로' 갔다. 그러나 이성곤목사는 여기까지 오기까지 타협보다는 강공을, 지혜보다는 힘을, 원칙보다는 변칙을, 합법보다는 불법을, 윗사람에 대한 도덕과 윤리보다는 신도들의 세를 선택하여 내부적인 입지도 약해졌다. 그러다 보니 많은 신도들의 반발을 샀고, 다시 컴백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통합교단에서 괘씸죄에 대한 후유증은 너무나도  컸다. 이성곤목사는 사면파동 이후 점점 주변부로 밀려났고 신도들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였다. 결국 이성곤목사는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갔다고 온 이후 신도들은 반발하게 되었고, 교회내 반대남성세력들로인해 이성곤목사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그런 결과, 광성교회는 이성곤목사에 대해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켰던 박재신 목사가 우여곡절 끝에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이성곤목사의 사람이었고, 이성곤목사를 지지했던 여성 다수의 신도들이 그를 지지했고, 57 vs. 43 으로 다수표를 얻어서 홀로 80% 이상을 얻어 담임목사로 되었지만 11시 메인설교는 하지 못하고 부목사들이 돌어가면서 설교를 하여 실제적인 담임목사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 매년 재신임을 받아야 하고, 백석교단의 헌법에 따라 임시목사라도  2/3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담임목사로 살어름판위를 걸을 수 밖에 없는 신세이다. 

 

이성곤목사의 남자 박재신목사 끝까지 신의 지켜

 

박재신목사는 이성곤목사의 남자라고 해서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사표까지 내려교 했던 목사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성곤목사에 대해 배반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사람이다. 다수의 이성곤목사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신도들은 그를 선택했다. 그의 신의와 광성호를 끌고 가기에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곤목사는 광성교회를 떠났어도 그나마 박재신목사가 담임목사가 된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이다. 박재신목사는 이제 친이가 아니라 친교(교인), 친신(하나님)으로 광성호를 끌고가야 할 것이다.   

 

이제 광성교회는 박재신목사시대가 열렸다. 당분간 이성곤목사지지파, 반대파, 중도파등을 꺼안아야 한다. 박목사는 누구하나 내쳐서도 안되고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광성의 전성시대를 다시 구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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