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교수를 아시나요?

한국 최초로 '고속 중성자 발생 장치' 만들어

홍영일 | 입력 : 2018/07/19 [10:56] | 조회수: 180

                                                                                                                                                                                                                                                                                                                                                         

이동녕 교수 (1927년생, 핵물리학자, 포항공대)는 이름이 같은 이동녕 독립운동가와 나이는 60년의 차이가 나지만, 애국활동을 한 것은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동녕 교수는 1945 3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의 징집을 피해, 유일하게 졸업할 때까지 징집이 연기되는 수원 고등 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를 다니면서 일인 학생들에게 차별을 받은 설움이며, 해방 후 좌익계통 학생들의 인민재판, 교수 배척 만행에 따른 과격한 시위 등에 대항하면서 혼란한 시기에 살았던 경험은 간추린 한 권의 역사책이었다. 이러한 혼란이 결국 동족상쟁의 전쟁을 불러왔다고 한다. (은퇴마을사람들의이야기(Seal beach Leisure World/리저월드한인문예부/2017)에 실린글에서)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영국University of London 핵물리학 Ph.D.,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 미국 Catholic Univ. 교수, Naval Research Lab. 연구원, 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 포항가속기연구소장. 대한민국3·1문학상, Naval Research Laboratory 출판상, 한국과학기자클럽 올해의 과학자상’, 한국물리학회 선봉상을 수상하였다.

 

부모님께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놀기를 좋아하던 저자가 어렸을 때, 한번은 동네 친구의 형님이 찾아와 가족들 앞에서 이동녕  때문에 자기 동생이 공부를 못하게 된다며, 아드님이 장난이 너무 심하니 주의를 주라고 하는 책망하는 바람에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 점잖은 학자 집안(부친이 사학자 이병도 박사)로 알려져 동네의 존경과 부러움을 샀던 집안에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가져다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어머니께서 우시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 엄청난 실망과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다음 날부터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부모님께서 가정교사(이달수 선생, 후에 문교부 장학관)를 상주시켜 저자를 지도하게 하였다. 80여 년 전 가정교사를 상주 시키는 집이 별로 없을 때였다. 

저자가 다닌 휘문 중학교는 대부분 선생님들이 한국인었고 민족주의 정신이 투철한 분들이었다.

그분들 중에 해방 후 활약하신 분들을 꼽으면, 박슬음(영문학자 외무부 장관), 장발(화백, 서울미대 학장), 이일(영문학), 김도태(지리학, 3·1운동 대표), 가람 이병기(서울대 교수), 정지용(영문학) 등 선생님들이 민족정신을 넣어 주셨다. 엄격하시지만 철저하신 신효선(물리), 이종서(화학) 선생님의 영향으로 물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강낙원(유도5)선생님에게 검도를 배웠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는 전체의 1/4정도가 한국 학생이고, 교수진도 단 한 분의 한국인을 빼고는 전부가 일본인이었다. 전통적으로 비교적 자유 사상이 짙었던 이 학교는 해방 전 훌륭한 한국인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우리 정부 수립 후 각계에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 무렵에는 군국주의에 물든 일인 학생들 때문에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학교 다니는 동안 강의는 소위 근로 봉사라는 미명아래 수시로 중단되고, 근처에 수원 군용비행장 확장공사에 투입되어 온종일 그곳에서 삽질 아니면 흙 나르기를 하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일인 학생들의 차별과 괄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벌써 은밀히 독서회 등 좌익운동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해방에도 수원농대 캠퍼스는 좌우지간에 불미스러운 싸움으로 얼룩진 시기였다. 날이 갈수록 이들은 대학 공부보다는 다른 곳에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 공산주의니 노동자 농민이니 해방이 계급투쟁이니 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막 새로 출범한 대학의 학장과 몇몇 교수들의 배척 운동으로 번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옳소하는 인민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맞이한 공포의 6·25 사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련이었다.

젊은 마음에 이대로 죽느니 차라리 공산군과 싸우다 죽고 싶었다. 9·28 수복 후에 제2국민병 소집에 응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중학교 이상의 학력자들은 무선통신 교육대대 입대하여 통신 교육을 받게 되었다.
4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1951 8월 어느 날 임관식이 부산에서 있었다.

육군에서의 15개월의 경험을 저자는 “90 생애에서 짧은 시일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심한 영양실조, 추위, 배고픔 등의 극한상황에서 맹훈련의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본다. 연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불굴의 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해군의 극비 프로젝트

전선으로 나갈 이동녕 소위에게 급히 해군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젊은 사람을 시급히 구하고 있는데, (해군의 J 소위가 이 소위를 천거하였다고 한다) 한국군에서는 군 간의 전적은 창군 이래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인데, 해군과 육군의 두 참모총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전격적으로 해군 소위가 된 것이다. 원자력에 지대한 관심이 있던 손원일 참모 총장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꿈꾸던 물리과 출신인 이동녕 소위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핵폭탄을 사칭한 사기 사건

1950년 중반 벼랑 끝에 몰린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솔깃한 핵폭탄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었는데, 이것만 있으면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참모총장이 주도하여 어마어마한 10만 달러의 자금이 조달되었다. 이 핵폭탄의 제조 사건이 사기로 밝히는데, J 소위와 이동녕 소위의 활약이 매우 컸다. J 소위는 참모총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일본에서 데리고 왔다는 김일청에게 이 매국 놈아!”라고 소리를 쳐 회의장에서 퇴장당하기도 하였다.

범행의 주동자 김일청이라는 자는 재일교포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있었는데, 그는 일본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 어마어마한 사기극을 꾸민 것이다.

해군 고위층을 속인 사건을 밝히기 위해 말단인 이 소위가 절차를 중요시하는 군대에서 참모총장에게 서신으로 전달하는 과정부터가 힘들었다.

에스터가 '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용감히 나갔던 심정과 같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참모총장은 각종 차량에 필요한 배터리 생산에 공을 인정받아 문책이 모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군에서의 외국 파견은 주로 3개월이나 길어야 6개월간의 단기 군사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이 소위가 가고자 하는 유학은 적어도 3, 4년간의 장기 유학을 말하며, 학위 취득이 목적이었다. 3개년의 유학기간 중 원자핵 물리 분야에서 학위 취득을 목표로 세웠다.

대통령 결재 서류가 국방부, 해군 본부, 해군기술연구소 등을 통해서 이 소위에게 돌아왔다. 그에게는 애초에 올린 유학 계획서와 함께 국방장관의 결재와 대통령 결재 그리고 대통령 친필로 불국(佛國=프링스)은 불가(不可) 덕국(德國=독일)은 가()’라는 빨간 잉크의 메모가 조건으로 붙어 있었다.

진해 해군 기술연구소에서 잊지 못할 사람들 중에는 언제나 동생과 같이 아껴준 J 중위(전환형 은 뉴욕대학교(NYU Buffalo) 교수로 활약하였고, 한국전력 고문과 한국원자력 사업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K 중령(김재원 교수), C대위(지태방 선배)는 잊지 못할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리고 손원일 제독과 김영철 해군 소장과 같은 참된 신사를 잊지 못하게 되었다.

 

징기스칸 요리와 유학 시절에 있었던 일

독일어 식단에 전혀 경험이 없었던 저자는 눈에 띈 것이 긴 단어 속에 소고기(bief)라고 적혀 있는 것뿐이라, 그것을 주문하였다. 갖다 준 접시에는 놀랍게도 빨간 날 고기가 수북하게 쌓여있고, 그 위에 분화구처럼 패인 곳에 날계란이 담겨 있었다. 서양 사람들이 날고기와 계란을 먹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웨이터가 불을 가져와서 요리를 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기대는 허사였다. 그러지 않아도 밤을 새우다 시피해서 잠을 못자 속이 메스꺼웠던 저자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나와 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것이 징기스칸이라고 불리는 이 지방의 유명한 소고기 요리라고 한다. 유학 첫 번째 웃지 못할 값비싼 실수였다.

영국의 University of London 소속의 Nuclear Engineering Laboratory에서 연구하기로 허락을 받아, 1955 8월에 영국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나중에 이것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동녕 해군 대위 소환 건'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 대위의 운명을 좌우할 아슬아슬한 순간에  영국이 공부하기가 좋다고 자리를 옮긴 것을 인제 와서 소환해서 처벌한다면 본인은 물론 물론이고 해군 측도 큰 손실을 보는 게 아니냐" 하며 문제 처리를 해준 분이 영국 대사로 새로 부임한 김영우 대사였다. 이 대위가 김 대사로부터 해결되었다는 말을 직접 듣게 되었다. 얼마 후 이분의 따님과 결혼하게 된다.

한국 땅에 최초로 고속중성자 발생에 성공하였다.

박사 학위 논문 심사인 구두시험고 마치고, 1959년 말 4 8개월 만에 귀국하기에 이른다, 또 일생을 약속한 한 여성과 함께 귀국길에 오르게 된 것을 큰 축복으로 여겼다.

해군에서 3년간의 유학비를 지급받았던 이 대위는 당연히 적어도 그것의 배인 6년 동안을 해군의 복무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원자력 연구원에서는 부족한 인재를 시급히 확보하기 위하여 저자(이동녕)를 원자력 연구원과 해군 측과 교섭을 벌려, 결국 그동안에 유학비와 여비를 연구원에서 부담하기로 하고 이동녕 대위를 제대시켜 원자력 연구소에 근무하게 하였다.

원자력 연구소에는 기초연구부는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제대한 김호길 촉탁 연구원 (후에 포항공대 총장)이 있었는데, 그가 같이 일하겠다고 하여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동녕 박사는 우선 국내에서 곧 착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여 '고속 중성자 발생 장치'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병원에서 쓰다 버린 의료용 X 선 장치를 구하기로 하였다. 폐품으로 방치된 흉칙스러운 30년이 넘는 10만 볼트 변압기와 정유 장치를 발견하여 아주 싼 값으로 구매할 수가 있었다.
1961년 심혈을 기울인 1 8개월의 노력의 결산으로 한국 땅에 최초로 고속중성자 발생에 성공하였다. 이 업적으로 1962 3·1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중성자는 원자력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중성자는 1932년에 발견되었고 1933년에는 핵 연쇄 반응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게 밝혀졌다. 1938년 핵분열 현상이 발견되었을 때, 핵분열에서 중성자가 만들어진다면, 이때 만들어진 중성자가 연쇄 반응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핵무기의 생산을 끌어냈다.


방사광가속기 부지조성

그런데 김호길 연구원은 1년도 채 못 돼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영국 버밍엄(Birmingham) 대학에서 가속장치 (사이클로트론 Synchrotron)에 관한 연구를 택하게 된 것이 원자력 연구소에서 짧은 실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훗날 포항공대 학장이 된 그가 저자를 설득하여 25년간의 미국 생활에서 귀국시켜 이번에는 1987년 그가 맡아서 시작한 초대형 방사광 가속기 건설에 책임을 맡기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저자의 포항 생활 12(1988 ~2000) 동안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985년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 이상적인 산()·학()·연()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박 회장은 은밀히 일본 쓰쿠바(Tsukuba)의 고에너지 연구소(KEK) 등을 실찰한 바가 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대규모의 첨단 연구시설에 감명을 받아, 포항공대를 더욱 빛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최첨단 연구시설을 건설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후에 우리나라 과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박 회장의 통찰력과 과감한 추진력에 두고두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국내 과학자들조차 그런 첨단 방사광가속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었을 때, 박 회장의 선견지명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리분야뿐만 아니라 생물학, 화학, 신소재 등등의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싱크론트론 방사광가속기(Synchrotron Accelerator)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가속기는 최 첨단형 제3세대 방사광가속기를 지향하는 야심에 찬 설계였다.

1989년부터 70m가 넘는 산을 깎아내리고, 계곡을 메우는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포철 측에 의해 신속히 진행되었다. 지하에 150m 길이와 선형가속장치가 둘레 280m 저장링이 설치되어야 한다. 침하를 방지하기 위하여 지면 깊숙이 있는 지반을 일일이 점검하고 땅 깊이 파일을 박고 두꺼운 철근 콘크리트 바닥 면을 마련해야 한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물론 근처에 차량의 왕래, 심지어 포항 만에 파도에 의한 흔들림을 고려한 특수 설계가 필요했다.

1994.12 포항 방사광가속기 준공(3세대 방사광가속기 완공)

이동녕 박사는 포항 광속기 건설 기간 3 번의 소장직을 연임을 거치면서 건설 완공한 다음 해 1996 8월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포항공대로 복귀한 다음 해 1997 8월에 정년퇴직함으로써 40여 년간의 과학자로서의 직장생활을 마감하였다.

글에 말미에 이 프로젝트는 고 박태준 회장의 추진력과 예산 등 뒷바침에 힘쓴 고 김호길 총장의 공동작품이다. (여기에 이동녕 박사가 빠질 수 없다.) 또 방사광가속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참여한 여러 연구원과 기술원들의 비상한 책임감과 열성의 결실이다.”라고 할수 있다.

[해설]

전자가빛을내려면광속에가깝게가속돼야한다. 전자가'빛의속도'도달하면빛을낸다. 이것을방사광이라고한다. 이것을만들어내는장치가 '방사광가속기' . 방사광은X 광원에비해 1또는 1이상의밝은빛을낸다. 좋은영상을얻을있다.

3세대기속기가X 보다 100만배밝다면, 4세대는 3세대보다도 1밝고, 태양보다 100밝다고한다.  미래창조과학부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완공해 실험 운전을 시작했다고2017.6.18일 밝혔다. 세포의움직임을실시간으로분석할있게되어획기적인신약개발에활용되고, 항암물질 등 신물질신소재분석을통한원천기술확보, 친환경 에너지개발, IT·반도체소자산업, 의료분야다양한산업발전에기여할것으로기대된다.

중자는원자력발전에가장중요한요소이다. 중성자는 1932년에발견되었고 1933년에는핵의 연쇄반응을조절할있다는밝혀졌다. 1930년대, 중성자는여러종류의 nuclear transmutation 중성자는 1932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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