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 방성대곡, 장지연 vs. 장신대 교수들

장지연은 사표와 친일로 , 장신대 교수들은 사표없는 기득권으로

기독공보 | 입력 : 2018/08/11 [07:42] | 조회수: 189

 장신대 교수들이 총회재판국이 명성교회건을 기각시켰다고 해서 시일야 방성대곡을 했다.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말은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신문에 발표한 제목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해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논설은 일본의 국권침탈과 을사5적(乙巳五賊)을 규탄해 국민총궐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65일간 투옥되었으며, 『황성신문』은 1906년 11월 20일자 압수되고,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이후 그는 경남일보 주필로 갔다. 경남일보로 부터 다시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친을행각으로 그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경남일보』는 1910년 11월 5일자를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호로 발행하였으며, 1911년 11월 2일자도 천장절을 기념해 2면을 일장기와 오얏 문양으로 장식해 ‘축천장절()’이라 표기하고 기념 한시()를 무기명으로 게재하기도 하였다. 친일행각 신문이었다. 그는 1913년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장지연은 『매일신보』 주필로 이동한다. 그는 매일신보에 1914년 12월 23일자부터  1918년 12월까지 약 700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게재한 산문과 한시들 중에는 유교()를 개혁하고 신학문을 장려한다는 내용의 글들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시정()과 일제강점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글들이 포함되었다. 그의 친일행각이 계속되었다.

 

장지연이 사망 후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등 언론인으로서 일본 침략에 저항한 공을 인정받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11월 국가보훈처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이후 1914년 12월 23일부터 1918년 7월 11일까지 『매일신보』에 글을 연재하며 발표한 시와 산문들 중 친일 경향의 글들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하였고, 2011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심의·의결되어 서훈이 취소되었다. 결국 애국으로 시작한 장지연은 친일행각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애국자가 친일파가 된 것 자체에 대해서 시일야 방성대곡해야 했다.

 

장신대 교수들이 장지연을 본 따서 교단의 명성교회 세습재판을 이유로 시일야 방성대곡을 한다고 했다.

 

국권의 침탈도 아니고, 독재정권의 항거도 아니고, 4대강유역으로 인한 환경파괴도 아니고, 최순실로 인한 국정농단도 아닌데 개교회의 행정심판에 대해서  목놓아 운다고 했다. 적어도 장지연은 친일행각을 하였지만 양심이 있어서 경남일보 사표를 내기도 하였다. 장신대 교수들이 시일야 방성대곡을 외치려면 사표를 내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둔 채, 시일야 방성대곡을 한다는 것을 누가 인정해줄까?

 

교수들은 울지도 않은 채 이름만 올려놓고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형교회만 추구하고 있고, 제자들에 대한 이해와 용서도 없는 채, 가차없이 징계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시일야 방성대곡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장지연을 흉내라도 내려면 장지연의 사표 흉내라도 내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장신대 교수들의 시일야 방성대곡 행각이 기득권행각으로 끝나지 않을까 염려된다.  목놓아 우는 심정인데 교수사표도 내지 않으면서 우는 것은 아무도 그의 진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교수 한 두명 정도는 삭발을 하고 사표를 내던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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